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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Sep 18. 2024

비즈니스 클래스와 매직패스


Day 1. From ICN to FRA

2012년 여름부터 다음 해 봄이 오기 직전까지 당시 터키(지금은 튀르키예지만 당시 터키였으므로 이하 ‘터키’로 칭하겠습니다)로 불리던 나라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서 몇 개월 머문 적이 있어요. 국제 교류형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서였고, 머무는 내내 영양시라는 별명이 있던 친구와 방 하나를 나눠 썼기에 사실상 혼자라는 느낌은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비록 나는 방에 누워서 열흘도 버틸 수 있는 타입인 데 반해 영양시는 하루에 한 번 외출을 하지 못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전혀 다른 성향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린 늘 같은 방으로 돌아와 누워 잠을 청했으니까….


터키에 머무는 몇 개월 중 한 번은 벨기에에서 구주 지역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동기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가 있었거든요. 그걸 빌미로 저와 영양시는 벨기에에 가는 김에 파리도 가고, 프랑크푸르트도 들렀더랬습니다. 프랑크푸르트와의 인연은 그게 시작이었어요.


프랑크푸르트의 첫 기억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유럽의 대전’ 같은 도시. (참고로 저의 본가는 대전) 쾌적하고 교통의 요지로 삼을 만하나 딱히 여행으로 오자 싶을 만한 볼거리는 드문. 그러나 끝내주는 커리 부어스트를 파는. 주먹으로 건물을 한 대 세게 후려쳤을 때 나올 것 같은 모양으로 올려 낸 백화점이 있는 곳. 처음 도착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동기들과 만나 들른 호프집에서 인생 최고의 맥주를 만난 도시.


구글링으로 찾아낸 앞서 언급한 그 백화점


푸르디푸르던 20대 중반이 시작될 쯤 시작한 인턴십은 2013년 초 종료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독일 일부 도시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프랑크푸르트를 다시 찾은 건 2014년 10월. 그땐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뮌헨, 퓌센 등 일부 도시도 함께 다녀왔었고, 또 작년엔 몇 년간 마음속으로 앓던 도시인 베를린에 다녀왔기에 프랑크푸르트와의 인연은 몇 년 간격을 두고 계속 갱신돼 왔어요. 새로운 목적지가 목표라면 굳이 고르지 않았어도 될 곳이었다는 얘기를 좀 길게 해봤습니다.



저는 지난해 말 만 10년을 꼭 채워 일한 회사, 또 그중의 만 7년을 한군데서 근무했던 경험을 아득바득 버텨낸 후 번아웃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더 다니다가는 월급 받는 산송장이 돼 있겠더라고요. 2월 28일에 휴직 전 마지막 출근을 하고 1년이 조금 모자라게 쉰 뒤 2025년 2월 말에 복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두 명의 꼰꼰한 상사 — 1차 고과권자와 2차 고과권자 — 와 얼음 위에 맨 발로 선 듯한 면담을 한 끝에 얻어낸 결실이에요. 매월 안정적으로 통장에 꽂히는 급여를 일 년이나 포기하는 건 꽤나 부담이 되는 결정이었지만 그땐 이미 저의 번아웃이 퇴로를 불살라버린 뒤였습니다.


7월 초쯤이었던 것 같아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또 구두로 만나는 지인들에게 늘 쓰레기처럼 살고 있노라 말하고 실제로 언행일치를 이룬 지 4개월이 될 무렵, 어딘가 아차 싶었습니다. 재직 기간 중 단 한 번 쓸 수 있는 1년의 휴직 기간 중 3분의 1이 벌써 소리 소문 없이 내 침대 시트와 소파의 주름 사이로 사라져 버린 걸 그제서야 통렬하게 알아차렸거든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어요. ‘너 이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후회해’의 조바심과 ‘너한테 이 정도의 기간이 휴식으로 필요했구나’의 토닥임 사이에서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휴직 기간 중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죠.


제가 일 년을 쉬기로 한 사실이 공표되었을 즈음 몇몇 상사들은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권유했고, 일부 지인들은 제주나 고성에서 오래 머물러보기를 권했습니다. 그치만 매일매일을 특정한 계획 없이 살기를 원하는 제게 한 달이나 일상을 떠나 무언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이 설계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어요. 비용도 만만찮게 들겠죠. 물론 저는 평균적인 한 해 소비 금액만큼의 휴직 자금을 마련해 둔 뒤 휴직을 시작했으므로 한달 살기도 여건에 맞춰 하려면 할 수 있었겠으나- 한 달 살기 하고 돌아오면 왠지 개털이 돼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 두려움은 어쩐지 떨치기 어렵더라고요. 무급의 무게란 그런 것인가 보다 싶었습니다.


1주일, 2주일, 3주일……. 저는 세 개 옵션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주사위 굴리듯 재보았습니다. 일주일의 여행은 회사를 다니는 중에도 여러 차례 해 봤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어요. 토요일부터 시작해 일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잡으면 8박 일정의 여행도 재직 중에 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한 달이 조금 못 되는 3주? 아, 물론 좋지만 제법 긴 그 시간 동안 어디 어디를 갈지 다 정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어요. 2주는 어떨까? 저는 보름 가까운 기간 동안 어딜 나가 있어 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저는 굳이 토요일에 출발하지 않아도 되는 무급 휴직자잖아요! 수요일에 출발해 다다음주 화요일에 돌아오건 목요일에 돌아오건 상관이 없는 일이란 말이죠. 여행을 얼마큼 오래 할지는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머릿속에 커다란 세계 지도를 펼치고 못 가본 나라와 가봤지만 또 가고픈 나라들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다 멈추기를 여러 날. 보름의 여행을 어디로 떠날지의 지난한 고민을 해온 것치고 최종 여행지는 생각보다 싱겁게 결정됐습니다. 7월경, 친한 동기가 2년간 프랑크푸르트로 파견을 나가 근무하게 되었거든요. 송별회를 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그 동기 언니에게 뮌헨에서 8월 내내 아델의 콘서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타국에 혼자 나가서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평생 한 번은 볼 수 있을까 했던 대가수의 공연. 그 둘이면 여행의 목적지를 독일로 정하는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게다가 또 다른 친한 동기가 올해 초부터 1년간 폴란드에서 체류 중이었고, 독일과 폴란드는? 기차 여행이 가능한 사이죠. 그럼 독일에 있다가 폴란드 여행까지 이어서 하고 돌아오면 되겠군. 목적지 세팅은 그런 식으로 헐거운 책임 의식과 두터운 유대감에 힘입어 이루어졌습니다.


여행 시기는 8월 말이 적당하겠다 생각하고 출국일을 정해둔 뒤 준비하는 동안 줄곧 저는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시간을 친한 동기들과 함께할 테지만 혼자 보낼 시간도 있을 텐데, 동양인 여성으로 유럽에 홀로 나가 있는 일은 안전보다는 위험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게다가 여태 늘 반려자 친구와 함께 두 명이서 해오던 여행의 일거리 — 혼자 하면서 길도 오롯이 혼자 찾고 짐도 혼자 챙겨 가며 네다섯 도시를 오가는 일 — 모두는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년간의 여행마다 의지해 온 사람을 한국에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도 천근만근이었어요. 굳이 짚자면 이건 사랑의 무게랑은 다른 개념인 것 같습니다. 외로움과 홀로 됨을 얼마나 짊어질 수 있는가에 더 가까운, 일종의 도전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미루리 미루리라’의 전형을 몸소 보이며 출국하는 당일 0시 30분까지 열심히 짐을 쌌습니다. 없는 건 그냥 가서 사자 생각하고 육중해진 캐리어를 닫고, 제때 못 깨면 넌 뒤진다는 압박 속에 네 시간이 채 안 되는 얕은 잠을 잤어요. 창문을 빗겨 내리치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깼습니다. 아니 며칠 내내 지겹도록 쨍쨍하더니 웬걸 떠나는 날엔 비가 몰아치는 거 아니겠어요? 비가 내리는 와중에 캐리어를 끌고 나와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영종대교와 인천의 뻘을 건너 겨우겨우 여전히 비가 후드득 쏟아지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수요일에 출국하는 희귀한 경험도 새로웠지만 이번 여행이 조금 더 새로웠던 이유는 바로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이 포함돼 있어서였어요. 몇 년간 모아온 마일리지 일부가 올해 말 만료된다기에 이참에 좌석 승급을 해서 써버리자 싶었죠. 비즈니스 클래스는 체크인 라운지도 따로 있었고, 수화물은 예쁜 오렌지빛 Priority 태그가 붙여진 채 놀랍도록 빠르게 부쳐졌고,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는 기존에 다니던 사람이 미어터지던 라운지에 비해 월등히 한산했습니다. 탑승권을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묘하게 이코노미 클래스로 탑승할 때보다 두 톤 정도 높은 목소리로 친절함을 양껏 드러내며 맞아주었습니다. 평소보다 빠듯하게 도착했는데도 여유로운 시간 속에 그 달라진 친절의 레벨을 경험하고 있노라니 몹시 기묘한 느낌이었어요. 돈으로 사랑은 못 사지만 친절은 살 수 있구나. 시간은 금이라는데, 나는 금덩이를 산 거구나.


난생 처음 들어가 본 비즈니스 클래스 게이트


동시에 저는 한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달구던 어떤 아버지의 글도 떠올렸습니다. 롯데월드에서 돈을 더 내면 살 수 있는 매직패스를 비판하는 글이었어요.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히 팽팽하게 갈렸습니다. 원래 돈 내고 시간 사는 거다, 그게 당연한 자본주의다 하는 반응과 필자인 아버지가 느낀 것처럼 이런 식의 경험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본주의의 부정적 면모를 학습시킨다는 반응으로요. 놀이공원의 패스 제도가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와 이코노미 클래스보다 더 심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사용 가능한 공간도 분리돼 있고 제공받는 서비스도 다르지만 놀이공원은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되 패스를 구입한 사람에게만 패스를 구입하지 않고 땡볕에 기다리는 대기열의 수많은 사람들을 ‘앞질러 갈 권리’만을 주는 거라고요.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지만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운명은 피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비즈니스 클래스의 호화스러운 서비스를 공손히 받으며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적어도 놀이공원의 패스는 그런 식으로 운영되지 않으면 좋겠다고요. 패스를 살 비용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또는 굳이 패스 구입에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유유히 나를 앞질러 가는 돈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 건- 분명 자본주의의 어떤 슬프고 비참한 자국을 뇌리에 새길 것 같다는 생각을요. 누릴 거나 누리지 별생각을 다 했다 싶습니다만 공항에 머물며 가장 오래 생각한 건 그것이었습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라면 한 번은 먹어줘야 하는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라면 (사진은 진라면 순한 맛으로 조리된 라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건 이제 8시간이 조금 안 되게 남았어요. 웰컴 드링크도 마시고 전채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젠틀하게 사육하듯 내어주는 근사한 기내식도 먹고,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13시간 50분의 긴 비행시간 중 절반도 지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독히 느껴지지만 180도 펴지는 좌석을 침대 삼아 베개를 베고 누워 있으니 장시간 비행도 이만하면 꽤나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직장인은 늘 사직서를 마음에 품고 산다죠. 저 역시 입사 후 3개월 만에 마음 한 켠에 생긴 사직서를 지금까지 고이고이 품어왔고, 지금은 휴직해서 출근하지 않는 자유를 십분 만끽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복직을 안 하는 건 애석하게도 제 근미래에는 없는 일 같습니다.


지금까지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항공기 A350에서, 임우유였습니다.




22/08/24 (괜히 유럽식으로 써봤습니다),

임우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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