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Day 1: From Airport to Hotel
공항에서 역대급으로 빠른 속도로 짐을 찾았습니다. 벨트 위에서 한 번의 회전을 채 하기 전에 나오는 짐을 보고 얼이 살짝 빠졌다가 이내 짐을 내리고, 게이트 앞에서 S 언니를 기다렸습니다. S 언니는 다행히 이르게 퇴근할 수 있어서 공항으로 저를 데리러 와준다고 했거든요. 감사한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언니를 기다렸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크고 복잡한 데 반해 표지판이 정말 거지 같아서 S 언니가 주차장에 차를 댄 지 한참 만에 게이트 앞에서 감격의 상봉을 했더랬습니다.
회사에서 파견 근무자에게 제공하는 여러 혜택 중에는 자동차도 있었는데, 독일의 도로 위에서 까만 BMW를 자연스럽게 모는 S 언니의 현지인스러운 모습을 보는 건 또 다른 재미였어요. 수십 대의 비행기가 긁고 간 탓에 하늘에 가득해진 비행운을 보면서, 도착한 첫날 보기에 너무도 멋지게 낮은 고도로 내리깔린 구름들을 보면서 이런 일은 평범한 여행자로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광경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느 여행지건 거기에 실제로 생활을 하는 지인이 있다는 건 여행에 엄청난 플러스가 된다는 것도요.
S 언니가 묵는 숙소는 한마디로 임시 거처, 즉 언니가 체류할 2년의 기간을 보낼 진짜 숙소를 찾기 전까지 머물 수 있는 곳으로서 두 개의 침대가 벽 한 쪽씩 차지하고 있는 제법 큰 방이었습니다. 제가 쓸 침대에 짐들을 엉성하게 얹어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길가 양옆으로 즐비한 커다랗고 풍성한 유럽형 나무들. 높은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 아기자기하고 호젓한 동네의 골목에는 사람 한 명 걸어 다니지 않는 조용함만이 깔려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을 이탈리안 식당에 이르기 전까지 걸었던 몇백 미터 동안 마주친 사람이 한 손에 다 꼽힐 정도로요. 이 동네는 한국의 수도권에 빗대자면 남양주 정도의 서울 외곽에 있는 도시라고 하더니 과연 인구밀도 또한 현저히 낮더군요.
언니가 소개해 준 동네의 자랑으로 삼을 만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는 이 동네 사람들의 절반은 여기 모여 있나 싶게 야외에 놓인 여러 테이블마다 중장년층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령층 구성은 다소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에서의 장면 장면들을 톺아 보면, ‘청년층용’, ‘중장년층용’으로 공간 이용 연령을 명시해 둔 게 아닌데도 공간마다 특정 연령층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이야기로는 소위 트렌디하다고 불리는 어떤 업장에서는 공간의 ‘무드를 해친다’는 이유로 장년층의 입장이 거절되기도 한다고 해요. 사대주의에 온 마음이 다 젖어서 독일의 문화를 칭송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연령층이 자유롭게 어느 공간이든 향유할 수 있어 보이는 여유만큼은 조금 빌려 가고 싶어집니다.
여담이지만 독일에서는 독일 음식보다는 주로 다른 나라 음식들이 조금 더 맛있는 편인 듯합니다. 라멘에 통조림 옥수수를 넣는다든가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해서 모든 아시안이라기보다는 베트남 또는 태국 요리들이 대체로 괜찮게 나오는 것 같아요. 만일 유럽까지 나왔으니 유럽스러운 음식이 먹고 싶다 하면 제가 권하고픈 건 이탈리안입니다. 구글 맵 띄워놓고 평점 4.3이 넘는 이탈리안을 시도해 보았을 때 크게 실망한 적이 없어요.
이날 저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실망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경악할 정도로 맛있었어요. 저희가 주문한 건 콰트로 포르마지오 피자와 사프란이 들어간 노란 페투치네 파스타였는데, 둘 다 맛이 있었고 특히 피자는- 여행 중에 먹은 것뿐 아니라 인생에서 먹은 피자 중 가장 맛있는 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니까요. 바로 뒤 테이블에서는 어른들이 카드를 하고 있고, 이탈리아계 독일인으로 보이는 서버들이 충실히 식사의 만족도를 물어 주었습니다. 피노 그리지오를 파인트를 시켜 두고 같이 곁들여 먹으며 살랑이는 저녁의 바람을 맞고 있노라니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어지는 그런 느낌. 위치가 흔히들 프랑크푸르트를 여행할 때 가게 되는 곳이 아니다 보니 추천한다 한들 얼마나 가실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모르니 추신에 상호를 남겨 두겠습니다.
Day 2: On the way to Würzburg
MBTI 얘기를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도 싶지만, 어떤 굵직한 성향을 말할 때 MBTI만큼 간단히 설명을 해주는 것도 없어서 죄송하지만 이번엔 언급 좀 하겠습니다. 저는 P이고, F입니다. P와 J 성향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제가 조금 더 납득하는 해석은 ‘통제’ 성향에 관한 해석인데요. 상황이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 J,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도 유연하게 반응하는 타입이 P라는 해석입니다. 상황이 본인 통제하에 진행되어야 해서 J들은 주로 ‘계획’을 많이 세우게 되고, 기존 계획이 수틀려도 암시롱도 안 한 P들은 굳이 계획을 촘촘히 세우지 않게 된다는 설명도 있어요.
P 중 P인 저는 이번에도 아주 성근 계획만을 가지고 독일에 왔습니다. 도시 간 큰 이동, 숙소 예약 정도만 해두었고 그 외엔 아무 계획도 없이! (해맑음) 사실상 이번 독일 여행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건 뮌헨에서 있을 아델의 콘서트이고, 여행 둘째 날인 22일과 23일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생각도 작정도 없었습니다. 여행 계획을 크게 정리해 두고 오긴 했는데, 2일 차와 3일 차에 적힌 계획은 아래와 같습니다.
Day 2: 기차표 예약 필요 *** | 뷔르츠부르크
Day 3: 기차표 예약 필요 *** | 뤼델스하임 밤베르크 마부르크?
이상입니다. 이게 전부 맞냐고요? 전부 맞습니다. 심지어 저 별표를 셋이나 붙여두고 제발 예약해 두는 일이 생기길 바랐으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어요. P인 분들의 일정이나 계획을 보면 주목할 만한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입니다. 물음표에 ‘여기 갈까? 근데 안 가도 좋아. 상황 봐서 결정하자’가 다 들어 있어요. 3일 차 계획을 해둘 때도 저 셋 중 어디 하나는 가겠지, 그러나 셋 중 어딜 제일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저 물음표를 붙여 두었던 것입니다.
3일 차는 모르겠고, 다행스럽게도 2일 차는 이미 정해둔 운명이 있었습니다. 뷔르츠부르크로 향해야 했어요. 다만 몇 시 기차를 타고 갈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는데, 나갈 준비를 하면서 잠정적으로 저는 9시대 기차를 타겠노라 혼자만의 작고 귀여운 결심을 했습니다. 드디어 바깥에 나왔어요. 버스를 타면 더 쉽게 빠르게 역으로 갈 수 있었지만, 배차 간격이 길기도 했고 내려가는 길에 근사한 공원이 있단 정보를 어제 S 언니에게 입수해 두었기 때문에 도보로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한국의 여름에서 습도와 약간의 온도를 걷어낸 날씨. 파란 하늘과 코끝에서 부는 미풍과 귓가에 이는 새소리. 여행하기에 완벽한 날씨임에 감탄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한적한 길을 내려갑니다. 어느 상아색 주택으로 들어가는 분이 눈을 마주치자 인사를 건네고, 주택마다 심어둔 꽃들의 종류를 관찰하며 내려가니 20여 분의 걷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언니가 말했던 그 근사한 공원의 이름은 Alter Kurpark였어요. 공원이 있는 줄 몰랐어도 아마 그 울창한 초록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빨려 들어가듯 결국 들어가게 되었을 법한 공원이었습니다. 공원의 왼쪽 뒷모습이라 해야 할까요, 저는 공원의 그 왼쪽 뒷모습에 순간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조그맣게 피어오른 분수에서는 물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터져 나오고, 세 명의 아이가 분수를 가운데 두고 뛰놀고 있었어요. 하늘색 모자를 쓴 아이는 옅은 분홍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분홍색 모자에 약간 옅은 파란 티셔츠를, 또 다른 아이는 밝은 청회색 티셔츠에 아이보리색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분은 멀찍이서 아이들이 뛰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모두를 농도가 다른 초록들이 크게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장면에 압도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이 조금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어요. 주책이다 싶어 또르르까지는 안 했지만, 그 장면의 아름다움이 정말이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 9시대로 정해둔 기차 시간은 어느새 탈 수 없는 시간대가 되어버렸습니다.
P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상황에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는 것. 저는 가뿐한 마음으로 공원을 더 둘러보다 나와 역으로 가는 길에 또 민트색 외벽의 카페에 붙잡힙니다. 10시대의 기차와는 그렇게 이별했더랬습니다. 카페에서 적당한 맛의 라테 마키아토를 마시고, 드디어 저는 기차역에 당도하게 됩니다. 일정 변경을 두 번이나 하고, 이미 24시간의 반 가까이가 사라져 가는 중이었지만 행복하다는 감각을 살풋 느꼈습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얼기설기 짜인 어설픈 일정표의 여행. 여행의 맛이란 이런 거지, Bad Soden역에서 멀어지는 S Bahn(지하철)에서 저는 조그맣게 웃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제가 웃은 걸 저는 아니까 그걸로 된, 흡족한 웃음을요.
지금까지 여행 3일 차, 어제의 일들을 즐겁게 반추하는 또 다른 소도시의 로컬 카페에서, 임우유였습니다.
23/08/24
임우유 드림.
p.s. #1. 인생 피자를 먹은 가게는 이곳입니다.
La Cucina im Ratskeller Neuenhain (Hauptstraße 45, 65812 Bad Soden am Taunus, 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