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자의 자기 돌봄
Prologue: 출근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는 개뿔**
2023년 8월 말.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8월 초, 사랑이 많고 손주들을 예뻐해 주시던 엄마의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한 달이 채 되기 전이었죠. ‘무너진다’는 표현을 누구보다 실감했던 때입니다. 장례를 한 번은 치르고(할머니), 한 번은 치를 수 없었고(아빠와 엄마는 오래 전 이혼하셨고, 저는 이 소식을 독일 여행을 하던 중 들었습니다), 회사에서의 저도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베를린에 있었기도 하고, 이혼 가정에서 20년을 보냈기 때문에 어딘가 머쓱해 부고를 알릴 수도 없었습니다. 딸마저 찾지 않은 빈소에 회사에서 지원하는 장례용품을 보낼 수도 없었을뿐더러, 결정적으로 발인을 단 하루 앞두고 아빠의 부고를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죠.
아빠는 늘 저의 인생에 크고 작은 구멍을 만들어낸,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시간이 참 모자란 부족한 아빠였는데, 심지어 돌아가신 이후에도 저의 일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빠 탓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빠가 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였는지 둘 중에 뭐였는지 또는 둘 다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빠의 죽음을 기점으로 저는 조금씩 더 메말라 갔습니다. 회사에 가는 게 너무 버거웠고, 매일 다음날 아침에 말해도 되는 걸 굳이 자리로 찾아와 열두 번씩 묻는 팀장이 주는 스트레스도 상당했어요. 팀장만 그러면 모르는데, 늘 모든 이슈에서 면피만을 찾고, 그룹원을 질책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룹장 또한 보기 싫은 존재였던 건 마찬가지였어요. 1차 고과권자와 2차 고과권자가 모두 별로인 상황에, 가족의 상실마저 더해진 2023년 하반기는 그래서 정말이지 더없이 황량했던 시기였습니다.
일부 유급에 재직으로 인정이 되는 육아 휴직은 딩크를 실천 중인 제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다행히 회사에는 — 무급이지만 — 다른 휴직 제도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자기 계발을 명목으로 쓸 수 있는, 입사 3년차 이상인 임직원 대상에게 허용되는 휴직 제도였어요. 저는 회사의 작고 튼실하지 못한 부품으로서 만 10년을 보낸 후였으므로 이미 조건은 충족한 지 오래였습니다.
휴직을 하려면 면담이 필요했습니다. 고과권자 두 명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면담이었죠. 며칠 밤에 걸쳐 자기 계발스러운 모든 항목들을 쥐어짰습니다.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에 가깝게 되도록 더 공부하고 싶고, 한참 전에 손에서 놓아버린 프랑스어 공부도 다시 하고 싶다고요. 이 계획들은 모두 휴직 며칠만에 구라로 판명되지만 고과권자님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무난한 구실로 보이기도 했어요. 공부는 꼭 회사 일에 연결되지 않는 것이니 다음 해에 쉬거나 또는 쉬지 않으면 어떻겠냐는 반박이 나올까봐 제가 준비한 카드는 ‘건강’이었습니다. 마음 건강과 몸 건강 모두요. 실제로 제 몸은 엔데믹으로 접어든 이후 사무실 출근일이 많아지면서 천천히 부서지는 중이었습니다. 성대에 생긴 물혹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삼십 대 중반인 제 나이에는 이르게 어깨에 오십견이 찾아온 뒤였습니다. 마음 건강은 더 심각했죠. 회사에 오는 것 자체가 싫었고, 얼굴이 천천히 죽어 갔습니다. 누가 봐도 회사에 오기 싫은 애처럼 보였을 거예요. 정말 회사에 있는 시간이 지옥 같았으니까요.
당시 회사에서 짊어지고 있던 큰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 숙제라는 것은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한번 숙제를 해야겠다 하고 일정이 대략적으로 잡히고 나면 그 뒤부터 실무인 저는 퇴로가 없어지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오로지 저 혼자였죠. 누군가와 분배할 수 있는 성질의 업무였다면, 상대에게 조금 의지하면서 헤쳐나갈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야속하게만 흘러갔습니다. 원래 연례행사처럼 있어야 하는 이벤트인데 작년 하반기에만 무려 세 번의 숙제가 주어졌어요. 그리고 그걸 또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해야 했었죠.
다행스럽게도 저희 부서에는 여러 명의 충원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죠. 돈 못 버는 스탭 직군으로 이루어진 부서에서는 딱히 인원 충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이유가 없거든요. 일의 스케일을 키워 보자는 상부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 사항이었고, 그 충원은 2월 초로 계획이 잡히게 됩니다. 그때 저는 어떤 동앗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저 동앗줄이 얼마나 튼튼하건 간에 내가 저걸 반드시 잡아야겠다,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면담 때 저는 이런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내 일정을 나의 마음대로 계획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연차 하나를 계획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큰 일을 세 번이나 연속으로 하반기에 몰아서 진행하려다 보니 그동안 저의 모든 리소스들이 다 축나버린 것 같다고요. 이 말은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고과권자 두 분도 인정하지 않기 어려운 일이었죠. 걱정을 오천만 번 한 것에 비해 두 번의 면담은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아마 다음의 제가 했던 말이 주효했는지도 모르죠.
“이번에 휴직 못 쓰면 다음에는 병가를 쓰게 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저는 3월 1일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년간의 달콤할 휴식이 시작된 거였죠.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것, 보기 싫은 상사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 출퇴근 인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 푸석푸석해지는 얼굴을 체감하지 않아도 되는 것……. 회사 생활이 주던 모든 번뇌를 벗어나 보낸 시간들은 꽤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직하고서 바로 요이땅, 행복해지지는 않더라고요.
휴직 후 4개월 가량을 자극적이지 않은 말로 표현하면 한량, 조금 나쁘게 말하면 쓰레기 상태로 보냈습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어요. 12시 또는 13시 경에 어렵사리 일어나 밥을 대충 배달음식 같은 걸로 해치워버리고 유튜브를 보는 생활. 유튜브에 더이상 보고 싶은 콘텐트가 없어질 때까지 유튜브를 봐도 되는 삶. 머리를 하루이틀 감지 않는 것도 대수롭지 않고, 옷이 누더기같아져도 지적할 사람 한 명 마주치지 않는 날들.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 지인들이 보면 분명 그것도 행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생활이었겠으나 어쩐지 저는 저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도 생산적이지 않고, 진짜로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이렇게 헛되이 휴식할 수 없다고 생각할 쯤엔 이미 반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버린 뒤였습니다. 아차 싶더라고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 남은 반 년은 이렇게 되는 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제가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여행이었습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죠. 저에게는 반려자 친구가 있어 휴가 시즌에 그와 일정을 맞춰 휴가를 다녀오곤 했던 지난 날이 있었습니다. 올해 저는 한마디로 1년간 연차 무제한인 셈이고, 반려자 친구에게는 제한이 있었죠. 게다가 반려자 친구 혼자 몽골로 여행을 떠난 적도 있어서, 그 사이 까먹은 연차를 감안하면 저와 여행 일정을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회사 다니면서도 7박 8박 여행은 거뜬히 다녔기 때문에, 여행을 갈 거라면 한 2주 정도는 다녀오고 싶었거든요. 그 정도는 되어야 쉴 때 다녀온 여행스러워진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후보지를 여러 군데 머릿속에 떠올렸고, 우연한 계기로 여행지가 정해지게 됩니다. 8월 21일 출국하는 비행기를 탄 이후부터 9월 3일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총 13박 14일의 여정으로 여행 계획이 세팅됩니다. 혼자 하는 여행이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조금 긴장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여행일자가 가까워 올수록 다가올 미지의 이벤트들에 설레 잠이 안 오기도 했을 만큼 저에게 갖는 의미가 특별한 여행이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두 나라, 다섯 개의 도시를 거치며 보낸 저의 13박 14일은 어땠나 되돌아보면 그건 어쩌면 이 글의 제목과도 같은 여정이었다 싶습니다. 저는 ‘살아있음을 사랑하려’ 여행을 떠났고, ‘살아있음을 사랑하며’ 여행에서 일상으로 복귀했거든요. 이어질 이야기들은 그 여행의 곳곳에 스민 에피소드이며 그 순간순간에 대한 감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야기들로 제가 보낸 특별했던 13박 14일의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어요.
* 브런치북의 제목을 지을 때 글자수 제한이 있어 실제 제목은 《살아있음을 사랑하려, 살아있음을 사랑하며》이지만, 브런치북 제목은 《살아있음을 사랑하려, 이내 사랑하며》로 지은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 바로 작년, 저는 《출근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브런치북으로 관련한 이야기들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