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유러피안의 삼시 세끼

2020. 04. 먹고사니즘에 대하여

by 틂씨

게으른 유러피안의 삼시 세끼





집에 머무는 일상은 매일이 거의 비슷하다. 장을 봐도 늘 비슷한 것들을 사게 된다. 뭐랄까, 효율로 점철된 장보기랄까. 처음엔 어떤 식재료를 얼만큼 사고 어떻게 보관하고 어떻게 돌려막기(?) 해야 할지를 몰라 낭패를 본 적이 많다. 이제는 금세 무르는 야채나 한 번 사 두면 상하기 전까지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재료는 잘 사지 않는다. 끼니를 매번 만들어 먹는 일이 식재료 스케줄링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인 가구는 뭔가를 만들기 위해 산 재료를 한 번에 다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면 그 재료가 상하기 전에 남은 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해야 한다. 식재료 유통기한에 따른 테트리스 같다.





아침은 최대한 간단하게,

날씨가 따뜻할 때는 우유와 시리얼 같은 걸로 간단하게 때우기도 했는데 한 여름이 아니고서는 대게 일 년 내내 아침엔 쌀쌀한 편이라 눈 뜨자마자 차가운 우유나 요거트를 먹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겨울의 난방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뜻함이 아니라 라디에이터에서 데워진 공기인 데다, 현지인의 '알맞은 온도'의 기준은 내겐 조금 쌀쌀해서, 집에서 마음 놓고 따뜻한 적이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하다. 대신 척박할 만큼 건조해서, 눈 뜨면 주로 따뜻한 차나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미리 사둔 사과나 바나나, 토마토 같은 과일/야채를 하나씩 집어 먹는 정도. 아니면 요즘엔 정말 쉬운 생크림 스콘을 자주 구워두는데, 아침에 냉동실에서 하나씩 꺼내 데워 먹는 것도 좋아한다. 포인트는 웬만하면 아침부터 불을 써서 뭔가를 만들어먹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일단 귀찮고, 늘어나는 설거지도 하기 싫다. 아침을 제외해도 하루 두 끼를 내 손으로 해 먹어야 한다고.




점심은 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는다.

집에서 마시는 커피부터 이야기하자면, 나의 주종목은 에어로 프레스(AeroPress)다. 일반 필터 커피보다는 압력을 조금 더 가하기 때문에 진한 맛이 나오는데, 프렌치 프레스(French Press)나 모카 포트(Moka Pot)보다는 연한 편이다. 하지만 에어로 프레스를 이용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그냥 쓰기 편해서다. 일단 모카 포트처럼 가열이 필요하거나 섬세하게 다뤄야 할 필요도 없고, 프렌치 프레스처럼 도구에 찌꺼기가 끼일 일도 없다. 이용하기도, 씻기도, 세상 쉽다.


원두는 집에 그라인더가 없어서 주로 분쇄된 원두를 사 먹는다. 보통 집에서 커피는 하루에 한두 잔. 카페인에는 둔한 편인데, 가끔 커피를 잘못 마시면 밤에 온통 잠이 안 올 때가 있어서 두 잔 이상은 마시지 않으려고 한다. 250g짜리 원두 한 봉지를 사면 향이 날아가도 한 달 내내 마셔야 해서, 차와 커피 원두를 파는 작은 가게에서 150g 정도를 갈아달라고 부탁한다. 산도가 높은(Fresh/Fruity) 커피보다는 고소한 향(Nutty)이 나고 조금 진한 듯하게 로스팅한 커피를 우유와 함께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커피 초보자라고 비웃어도 산미는 좀처럼 입에 맞지 않더라. 요즘 주로 마시는 커피는 블루마운틴(Blue mountain)이나 얼스(Earth). 원두 가게 아저씨의 추천을 지나 대 여섯 번의 실패를 딛고 발견한 귀한 취향이다.


더치들은 (특히 쉐어 하우스 경우에는 더,) 냉장고도 엄청 작고, 냉동실도 없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이 집에는 작지만 냉동실이 존재한다. 냉동실이 있으면 파나 고추 같은 식재료들을 잘라서 얼려놓거나 남은 빵을 곰팡이가 생기거나 마르기 전에 넣어두기에 좋다. —냉동실 없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여튼, 보통 샌드위치는 간단히 사워도우나 멀티 그레인 빵에 버터를 발라 샌드위치 그릴에 구운 후, 햄이나 치즈, 계란, 아보카도 등을 얹어 먹는다. 통밀 빵은 왠지 너무 질감이 껄끄러워 입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흰 빵은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으니까. 소스는 따로 안 바른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거의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지겨우면 빵 종류를 바꾸거나 새로운 치즈를 시도해보면 된다. (이 유명한 낙농 국가의 치즈 종류는 너무 다양해서 아직도 마트의 모든 치즈를 먹어보지 못했다!)




저녁은 그야말로 랜덤인데, 어쨌든 따뜻한 한 접시 요리를 주로 한다.

한식과 밥, 김치, 국물 등에 그다지 애착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주로 사기 쉬운 —그날의 마트 할인 품목 되시겠다— 식재료로 만들기 편한 음식을 해 먹는다. 밥솥이 없는데, 냄비로 밥을 하면 설거지까지 귀찮음이 배가 되기 때문에 밥은 자주 하지 않는 편. 점심에 샌드위치로 탄수화물을 잔뜩 섭취했기 때문에 저녁에는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을 많이 챙겨 먹으려고 하지만, 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간단하게 야채 볶음, 버섯이나 참치 등을 넣은 오일/크림 파스타 같은 한 접시 음식으로 먹고 치우는 경우가 많다.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붉은 고기의 냄새를 별로 안 좋아해서 주로 닭 가슴살과 흰 살 생선, 두부로 단백질을 채운다. 여름에는 비빔국수나 샐러드처럼 찬 음식도 가끔 먹지만 그 외엔 무조건 무조건 따뜻한 음식. (하루 한 끼는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 가끔 한식이 생각나면 간단한 찌개나 버섯볶음, 전, 유부초밥, 잡채 같은 것을 해 먹기도 하는데, 주로 한식이지만 현지에서 재료를 구하기 쉬운 종류가 주 메뉴다. —볶음 요리엔 마법의 굴소스를 주로 이용— 그리고 종종 친구들과 함께 먹으려면 외국인도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대략 이 정도인 것 같다.




처음 왔을 때엔 요리에 서툴러서 매일 저녁을 뭘 해 먹나, 도대체 장을 어떻게 봐야 야채를 상하지 않게 다 먹을 수 있나, 재료의 유통 기한이 어느 정도 되나 등등이 고민이었다. 마늘이나 고추를 냉동실에 넣어 두겠다고 한꺼번에 다듬다가 화상을 입거나 손에서 열흘 동안 마늘 냄새가 난다거나 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또르륵...) 이제는 보통 밥 해서 먹고 치우는 것 까지 한 시간 정도면 끝이 난다.


다만 매일 해 먹는 게 너무 귀찮아서, 최대한 간단히 해 먹으려고 한다. 어쩜 그렇게 끼니는 멈추지 않고 돌아오는지. 엄마가 늘 저녁마다 오늘은 뭐 해 먹지 하던 고민을 이제 나도 한다. 다 결국 먹고살려고 하는 일들 아니던가. 오늘은 남은 야채를 몽땅 털어 일본식 카레를 만들었다. 가만히 집에 있으니 자꾸 식탐이 느는 것 같아 걱정이지만, 저녁까지 해 먹고 나면 하루가 무사히 지났구나 싶어 묘한 안심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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