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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Feb 21. 2021

무서워하면서도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feat. <생일 편지> 안미옥






나는 무서우면 발을 자주 멈추는 사람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남들이 뭘 하는지 둘러보고.

지금 걷는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나는 혹시 이미 정해진 길에서 도태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 하면서.




언젠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이가 지긋했던 워크샵 책임자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

"맨날 버티지 못하고 인생을 자꾸 다시 시작하는 학생들이 있더라. 그러지 말고 일단 끝을 봐."


그 말이 귀에 맴돌았던 이유는, 내가 그때 이미 두 번째 입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거야. 그래, 이번에는 다시 시작했으니까, 다른 시작을 또 하지는 말자. 이것으로 끝을 맺자. 하는 다짐을 했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래도록,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면 견디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곤 해. 문제집을 끝까지 풀지 못하고 새 문제집을 꺼내는 것처럼, 자꾸, 다시 재시작 버튼을 눌러. 그것도 일종의 회피겠지.


인생은 어쩌면 행복과 불행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양 극단은 이론적으로나 실제 할 뿐,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지. 그런데도 나는 자꾸 어중간하거나 찝찝한 마음이 들면 그것을 당장 씻어내거나 뱉어내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쩔쩔매. 그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 인생인데,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른 일에 묻혀 잊혀질텐데, 그렇지 못하고 멈춰 서서 그걸 없애야만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마음들은 생각보다 더 끈적하고 더러운 기분이라서, 뭐랄까 피부에 축축한 무엇이 달라붙어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도무지 모른척 하고 나아가기가 어려운 거지. 씻어내고 싶어. 그런 것이 묻었던 흔적조차 없었으면 좋겠어. 희거나 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런 순간이 내게는 너무 자주 와.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자주 맴돌게 돼. 중간에 망친 자국을 못 견디겠어. 지워버리고 싶어. 깨끗하게.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려. 그러면 잠이 쏟아진다. 발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스팔트가 녹고 있어서. 긴 장화를 샀다. 비가 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한번 사라진 계단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철제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면, 도착할 수 없게 된다.'

가지고 있던 지도에 쓰여 있던 말. 나는 백색 지도를 보고 있다.
주머니에 구겨 넣자 주머니가 터져 버렸다.

시작을 시작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작이 필요했다.
베란다의 기분. 축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틀렸어. 틀려도 돼.
하얀 목소리가 벽에 칠해진다.

발이 더 무거워졌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생일 편지> 안미옥 시인.




어느 작가님이 <생일 편지>라는 안미옥 시인의 시를 SNS에 올려주셨어. 그 시의 마지막 한 구절,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그 말이 자꾸 마음에 오래 남아서, 조용히 읊조려보게 돼.  


있잖아, 무서운 마음이 들 때, 딱 한 걸음만 더 걸어보자. 도닥여주는 것 같은, 위로가 되는 말이었어.


무섭더라도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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