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틂씨 Mar 03. 2021

언젠가는 다정하게 길고 긴 편지를 쓸게

[Letter] Dear M




- 생일 축하합니다!!! (폭죽) (케잌) (하트)   

 고마워, 그런데  생일은 25일인데, 15일이랑 헷갈렸구나?  


다른 건 몰라도 당신에게 인사를 전해야 하는 날들은 잊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나는 자주 한국의 리듬을 잊게 돼. 이번엔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 전쯤 미리 알람을 맞춰놨거든. 음력을 양력으로 변환하는 어플리케이션에서 날짜를 확인하고, 핸드폰 알람을 설정해두었지. M's Birthday - 2시간 전 알림 ON.


내가 밤에 메세지를 보내 두면, 한국의 아침에 확인하리라 생각하고 잠이 들었어.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모티콘이 요란하게 생일을 축하하는 움직임 뒤에 저런 황당한 문장이 적혀있었지. 맙소사. 아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1과 2가 헷갈린 거지? 참나, 어이가 없어서. 뻘쭘한 마음을 꾸역꾸역 누르고 다시 왁자지껄한 이모티콘을 쏟아내며 그럼 10일 있다가 또 축하하지 뭐! 하고 웃었지만, 화면 뒤의 나는 좀 참담했어. 나라는 인간이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뭘까.






있잖아, 늘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거든.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차마 전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단 말이야. 그런데 한 번도 못했어. 당신 곁에 당신 남편이 있어서. 당신에게만 길고 긴 연서 같은 편지를 쓰고 나면 그 사람이 서운한 마음으로 해코지를 할까 봐. 그래서 결국 당신의 마음도 엉망진창이 될까 봐. 매번 여행을 떠나서, 혹은 당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세상 제일 예쁜 카드를 마음을 다해 고르고 골라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늘 한 마디도 적지 못했어.



나는 왜 사랑의 말을 적는 일에도 그렇게 누군가의 눈치를 보아야 했을까.  

엽서의 뒷면에 집 주소를 적으면, 당신과 함께 사는 사람이 절반의 확률로 우체통에서 엽서를 집어 들겠지. 내용을 볼 거 아냐. 혹은 봉투에 담겨 당신 이름이 적혀 있어도 묻겠지. 뭐라고 적었어? 하고. 보내는 이에 내 이름이 적혀 있을 테니까. 그걸 뻔히 알면서 당신의 이름만을 적고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길고 긴 진심을 전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 다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적고 싶지는 않았지. 그럼 결국엔 늘 생일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같은, 주어도 없고 디테일도 없는, 감정 따위 담기지 않은 스팸 같은 한 줄만 적고 마는 거야.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이모티콘은 사실 내가 부끄러울수록 더 요란해지더라. 그 작은 노란색 창 속에서라도 귀여운 곰돌이들이 나와 춤을 추며 하트를 내밀거나 꽃 가루라도 뿌려주면, 실제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뭐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오히려 어릴 땐 이런저런 생일 선물을 꼬박꼬박 용돈을 모아 고르고 샀던 것 같은데, 과년해진 나는 여전히 먹고 살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 선물은 커녕 때때로 당신의 생일 인사를 잊기도 해.



왜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느냐면, 당신의 밤과 나의 밤이 겹치지 않는 시간에 그 사람이 없는 시간을 찾기가 너무 고단해서야. 나는 진심으로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고 싶어. 그 덕분에 어린 나는 집이 안전하고 편안한 쉼터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랐어. 어린아이에게 안전지대가 없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아? 그건 스물네 시간, 언제나 사람과 공기를 의심하는 일이야. 그래서 내가 눈치를 많이 보나 봐, 어디서든. 당신도 그 마음을 알잖아. 사람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예측 불가능한 삶. 당신은 어떻게든 남들처럼 참고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나는 아니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거야. 당신이 속상할까 봐 말을 못 한 것뿐이지. 그 사람만 없으면 어디서든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내게는 그를 향한 좋은 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감정을 솔직하게 당신에게 말할 자신이 없어. 당신도 힘들었을텐데, 늘 내게 ‘너 그러다 언젠가 후회한다'라고 말할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 상해.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 안에는 삼십 년이 넘게 묵은 검고 찐득한 것들이 가득해. 더러운 기분이라 떼어내고 싶은데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가 박혀서 움직이지도 않는 끈적한 것들. 그게 자꾸 나를 좀먹어. 내가 잡아먹혀. 당신 눈앞에 직접 보여줘야 내 말을 믿어줄까? 나는 화가 났고,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았는데, 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날 때마다 생각했어. 그 사람에게 길고 긴 편지를, 그동안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저격하는 마음으로 쓴 원망이 가득한 투서를 보내고 사라져 버리면 어떨까. 도무지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라도 알리고 나면 내 속이 좀 시원해지지 않을까. 나의 반응은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내게는 비난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내가 싸가지 없는 자식이기 전에, 당신이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가장이라는 사실이 먼저라고 팩트를 알려주고 싶었지. 그러니까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그런데 우스운 건 뭔지 알아? 그런 편지를 보내면 집에 있는 당신에게 대신 화를 뒤집어 씌우지는 않을까, 아니면 뒷목이라도 잡고 쓰러지거나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 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내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지. 누가 누굴 걱정해. 거지같이. 아, 정말 거지 같다. 그걸 읽는다고 그 사람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그냥, 그것도 집이라고, 돌아갈 집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겁이 났던 가봐. 분노한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영영 떠나서 나만의 삶을 새로 개척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에 언젠가는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사람이 화를 낼 때마다 날짜와 시간을 적었던 적도 있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부모가 잘못한 일에 그의 행동을 대입해가며 회차를 적고 내용을 적으면서, 그렇게 사건 기록 모으듯이 기록을 하던 시절이 있었어. 언젠가 그가 늙고 병들고 힘이 빠지고 나서라도 꼭 전하고 싶었거든. 당신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일들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당신 탓이라고. 분개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도 마음을 적던 시간들이 있었어.




언제부터 그런 일을 멈췄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더 이상 내 삶의 어떤 시간과 에너지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나서부터였을 거야. 오래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더라. 아무리 아무리 미워해도 도무지 끝이 나질 않았어. 사람에게 주어진 에너지는 한계가 있는데 내 에너지는 너무 빠르게 소진됐지. 그래서 미움도 멈추기로 했어. 최대한 멀리 떠나기로 했지. 그런데도 아직 찐득한 타르처럼 어떤 기억과 어떤 말들은 기억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어. 잊히질 않아. 살아있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버렸어.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원래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려던 건데.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내 곁에 있어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건데.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당신의 엄마가 해주었다던 것처럼 옆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뜨끈한 팥밥에 잡채를 볶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왜 늘 받기만 할까. 결국 영원히 당신에게 그저 받기만 하는 존재로 남겨질 것 같은 기분이라 겁이 나.


생일엔 당신도 엄마 생각이 날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데다, 또 당신이 슬퍼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어. 겨울엔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의 제사가 있고 당신의 생일 너머 봄이 지나면 또 돌아가신 엄마의 기일이 오고. 벌써 2주기 째인데 당신의 계절은 어떻게 지났을까. 올해 겨울은 그래서 더 추웠으려나. 옆에 있어주지 못한 나는 알 수가 없네. 


M,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만 다정하게 길고 긴 편지를 쓰는 일을 할 용기가 쉽게 생길 것 같지가 않아. 

대신 우리는 지금 다정한 카톡을 더 많이 하자. 잔소리 말고, 따뜻하고 기분 좋아지는 말들로만. 귀엽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이모티콘을 잔뜩 쓰면서.




사랑하는 나의 엄마, 진짜, 생일 축하해요.




         

이전 10화 연필을 깎으면 나무 냄새가 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