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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Jul 25. 2019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용기  

인생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용기.





"엄마는 삼십 년 전쯤에 말이야, 결혼하기 전에 돈을 열심히 벌어서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이모랑 외삼촌이랑 조카에게 없는 살림에 그때 모은 돈으로 오십만 원씩, 백만 원씩 어려우니까 보태 쓰라고 주기도 하고 그랬거든. 근데 되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었어.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너한테 선물도 주고,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아. 가만 모아둬 봤자 누가 다 가져가 버리고 없어져버린다."


오 년 전쯤의 어느 날, 이 말을 엄마에게 듣고서 일기의 어느 구석엔가 적어두었다. 엄마가 너무 짠해서. 

별것도 아닌 것 같은 말에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잊어버리지 말아야겠다, 이 마음. 하고. 


그렇지만 정작 이 말을 해 주었던 엄마는, 나중에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언제 그런 적이 있냐며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선 오히려 나눠주는 건 좋은 거야, 다 돌아오게 되어있어. 하고 덧붙인다. 

(아니, 어머님, 말이 앞뒤가 다릅니다만..?)






엄마, 나는 이제 맛있는 걸 먼저 먹고, 좋은 걸 먼저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이상 아끼지 않고. 그래서 영화가 재미없으면 영화관을 뛰쳐나올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고 싶어. 재미없는 영화를 그저 표가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보고 있지 않는 사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더 이상 가성비와 효율성의 세계에만 머물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그저 성실하고 성실하게만 사는 게 좋은 것이 아닐지도 몰라. 왜냐면 그렇지 않기가 너무 어렵잖아. 우리에겐. 

막상 이렇게 마음을 먹어도, 우리는 또 아끼고 아끼고 아끼면서 살겠지. 작은 것 하나에, 사치인 건 아닐까 의심하고 또 물어가면서. 엄마, 우리의 디폴트 값은 '과하게 아낌'이야. 그러니까 좀 사치를 부려도 돼.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노력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때? 엄마가 나중에, 그래도 그때 그건 실컷 해봐서 미련이 남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왠지 짜릿하지 않아, 그렇게 산다는 거?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 하나씩 시도해보자.




영화가 재미없을 때 영화관을 뛰쳐나올 수 있는 용기란 어떤 걸까. 아마 엄마가 듣는다면, 괜히 비싼 돈 주고 영화관에 가서 왜 그냥 나오느냐며 타박이나 받겠지. 그런데 그게 은근히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영화관까지 시간 맞춰 가서, 만 원이나 내고 표를 끊었는데, 굳이 중간에 나가야 할까, 혹시 후반에 반전이 있어 재미있어지진 않을까, 그래서 나간 걸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이왕 앉아서 보는 거 그냥 끝까지 보자. 이런 게 사람 마음이니까. 


이제 어지간해서는 영화의 선택에 실패하지 않게 되었지만, 한때는 종종 선택에 실패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다 중간에 나온 적은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블랙 스완, 2010>을 볼 때였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석권한 명작을 보다 나는 도대체 왜 뛰쳐나왔냐면... 


나는 공포에 약하다. 스릴러, 호러 등 장르가 어찌 되었건, 사람이든 귀신이든 피든 어떤 존재가 나오든 간에. 당시의 나는 영화의 중반도 되기 전에 화면의 절반 이상을 눈 혹은 귀를 막으며 봐야 했다. 일행이 있었는데도,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영화관을 뛰쳐나왔다. 더 이상 그 안에서 괴롭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았다. 남들이 얼마나 대단한 영화라고 평가하든 간에, 그저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영화였다. (물론, 개인의 경험과 상관 없이 블랙 스완은 훌륭한 영화다.) 그 영화를 참고 끝까지 봤다 한들, 내게 뭐가 남았을까. 고통스러운 영화를 끝까지 봤다는 인내심? 남들이 본 유명한 영화를 나도 봤다는 자부심? 


인생에 이렇게 확실한 것들만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나로 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스스로의 욕망과 결정에 충실한 채로. 그래서 가끔 내 멋대로 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이런 비유를 하게 되었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나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것이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용기에 더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이 길이 아닌 것 같을 때 기꺼이 멈출 수 있는 용기. 엄마도, 나도, 이미 너무 많이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혹은 그렇지 않아도 별 수 없으니까 같은 이유로 관습적으로 하던 행동을 멈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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