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떡국 색은 흰색이니까
Happy new year!!
뜬금없이, 2월에 해피 뉴 이어 라고?
내가 아시안인걸 아는 주변 외국인 친구들이 음력설(Lunar calendar new year, 아 길다)을 맞아 happy new year! 인사를 해주었다. 나름 신경 써서 한 배려이겠으나, 대게 이들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의 춘절(Chinese new year)이다. 아무래도 유럽에서 소수민족인 아시안 중에 중국인의 비율이 높고, 아시안 문화를 차이나 타운 등을 통해서 접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쉽게 '중국 = 아시안 전체'라고 믿는 가운데, 친구들 중 하나는 내게 자랑스럽게 붉은색을 내밀었다. lunar calendar new year에 붉은색으로 축하하는 거 맞지? 하고.
아니. 안타깝게도 그건 중국의 춘절(Chinese new year) 문화일 뿐이야. 한국의 설은 특별히 붉은색으로 축하하지 않는단다. 아시아에서는 나라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lunar calendar new year 축하를 하고, 그게 꼭 chinese new year를 의미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뭐, 이해는 한다. 나도 네덜란드에 살게 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전혀 몰랐고,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으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거기까지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런 시즌이 되면 종종 명절이나 한국, 혹은 가족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 전혀.
한국의 명절에서 탈출해서 너무 기뻐. 명절이야말로 가부장제의 집합체거든. 짙은 유교사상에 물든 오래된 관습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게 살아있는 사람들을(특히 며느리들을) 괴롭히지. 시골에서 자라난 나의 엄마는 '원래 그런 것’ 들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니야. 명절 때마다 엄마가 며느리로서 해야 했던 많은 일들을 보며 나는 일찌감치 십 대부터 웬만한 친가의 행사를 보이콧했어. 한국의 십 대는 언제든 공부를 핑계 삼을 수 있거든.
명절이면 엄마는 늘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녀의 남편은 그런 엄마를 별것 아닌 일을 부풀린다며 못마땅해했지.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늘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했고, 동생과 나는 어릴 땐 각자의 방에, 커서는 함께 카페로 도망쳤어. 매번 반복되는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를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그 모든 일의 원흉인 가장에게 대놓고 대들만한 용기도 없었고. 나는 당장 집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쳐봤자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쯤은 파악한 십 대였거든.
생각해보면 설은 추석보다 특별히 더 싫었어. 내가 세배를 지독히도 싫어했거든. 그걸 강요당할 때 어쩐지 굴욕적인 기분이 들더라. 설날 아침이면 사촌들과 함께 줄지어 좁은 거실에 모여 쭈뼛거리며 절을 해야 했지.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닌데 여성스럽게 손을 양쪽으로 짚는 평절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큰절도 어쩐지 어색해서 옆에 서 있는 사촌들을 따라 무작정 엎드렸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평생 안녕하세요 와 안녕히 계세요 이외에는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할머니나 다른 친척들에게 성의껏 고개를 숙여 절까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뻘쭘하게 서서 형식적인 덕담을 듣고, 현금을 주섬 주섬 꺼내어 몇 장씩 나누어주면 그걸 받아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은 채 우르르 다시 작은 방으로 들어가 카드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 자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죽였지. 어른들이 나서서, 이제 가자! 하는 이야기가 방 바깥에서 들려올 때까지. 아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거든.
어릴 때 명절 근처에 시골의 친척 집에라도 가게 될라 치면, 부친은 동생과 나의 고개를 손으로 꾸욱 눌러 인사나 절을 시켰어. 급한 마음으로 그놈의 예절을 차리느라. 어린이들에게 차근히 설명하고, 낯선 상황에 적응시키고, 민주적으로 인사를 제안할 여유도,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나는 늘 더러운 기분이 되었지. 절을 강요당할 때마다 고개를 강제로 힘주어 누르던 그 손의 힘이 떠올라.
외할머니댁에서는 그렇지 않았거든. 억지로 형식을 차려 절을 할 필요가 없었지. 대신 할머니는 우리를 안아주었어. 아이고오~ 내 새끼들 왔나! 하고. 동생과 나는 할무이~ 그동안 잘 지내셨어? 하고 말을 걸었지. 멀다는 핑계로 자주 가 뵙지도 못했지만, 할머니는 한동안 우리를 먹이고 입히며 키워주신 친밀한 사이였거든. 어쨌든 거기에선 가짜의 마음이나 예절 같은 걸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었어. 뭐든 다 진짜였지.
불퉁한 마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드러나더라. 친가에서 끓이는 떡국은 늘 '고깃국'에 가까웠어. 고기를 잔뜩 넣어서 짙은 갈색이 도는 떡국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어. 원체 고기 냄새에 예민해서 잘 먹지 않는 데다, 내게 맛있는 떡국은 따로 있으니까. 엄마의 떡국은 하얗고 말갰거든. 멸치육수에다 내 입맛에 맞추어 고기는 뺀 채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의 국물에 노란색 지단과 녹색의 다진 파와 검은색의 고소한 김가루를 잔뜩 뿌려 먹는 떡국. 그 떡국이라면 커다란 국그릇으로 한 그릇도 거뜬했지.
하지만 집안의 막내며느리는 힘이 없잖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시어머니의 레시피에 따라 고기를 잔뜩 넣고 그들의 방식대로 떡국을 끓이는 것뿐이야. 나는 수동적인 공격 모드가 되어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저 끓여주는 떡국을 밥그릇에 겨우 반 그릇 정도 떠먹었어. 할머니가 쇳소리로 무뚝뚝하게, 더 먹어라. 하면 무표정한 얼굴로 괜찮아요, 배불러요 하고 일어서면서. 속으로 엄마, 나는 이 떡국이 싫어. 고기 냄새가 너무 많이 나. 생각하면서. 그럼 꼭 한 마디를 더 들었지. 쟤는 왜 저렇게 밥을 안먹냐, 쯧쯧. 엄마를 나무라듯이.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닌 날에 다시 말갛고 흰 떡국을 끓여주었어. 그럴 때면 신이 나서 말했지.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끓여준 떡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더라. 떡국은 아무렴, 무조건 흰 멸치 국물이지!
그래서 여전히 나는 전통 명절이 그립지 않다. 다시는 그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의 설날은 언제까지나 흰색일 것이다.
중국식의 붉은색도 아닌, 그렇다고 고깃국처럼 탁한 색도 아닌, 엄마의 마알간 떡국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