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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Nov 29. 2019

명절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feat. <며느라기>





명절이면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싸움닭처럼, 매번, 혼자.


웹툰 며느라기 (https://www.instagram.com/min4rin)




이 익숙한 광경을 나는 매년 명절에 친가에 갈 때마다 봐야 했다.

어째서 며느리들은 혹은 자리가 없으면 여자애들까지 작은 상에 앉아서 따로 밥을 먹는지, 왜 떡국이나 밥을 더 먹고 싶으면 직접 퍼오지 않고 막내며느리가 매번 일어나서 도와야 하는지, 다 먹지도 못할 차례나 제사 음식들은 왜 그렇게 힘들여 넉넉하게 만들어야 했는지, 심지어 몇 시간 동안 음식을 했는데 밥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는 왜 또 며느리가 해야 하는지,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배부르다고 누워 있는 남자(어른)들과 아이들에게 과일과 후식을 꼭 갖다 바쳐야 하는지, 음식을 나르는 자잘한 심부름은 왜 여자들 몫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늘 분하고 화가 나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 불평을 할 때마다 엄마는 어른들께 그러면 안된다고 나를 꾸짖었지만, 그러는 엄마도 명절을 치르고 나면 늘 힘들어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결국 싸움이 났다. 엄마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도 왜 시댁 어르신들은 말을 그렇게 하는지, 당신은 왜 좀 더 일을 도와주지 않는지' 토로하면(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부친은 '왜 명절만 되면 그러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생색내지 말고 웃으면서 해라, 어른들은 원래 그러니까 이해해라' 라며 엄마를 못된 며느리를 만들었다. 그의 주장은 언제나 '당신 하나만 참으면' 모든 상황이 괜찮을 텐데, 왜 그까짓 걸 못 참아서 이 사단을 만드느냐 였다. 그렇게 별것 아닌 일이라면 왜 역지사지로 생각해 볼 수 없는 건지. 그 지긋지긋한 싸움이 싫어 명절 다음엔 집 밖을 떠돌았다.  


친가는 차로 30분 거리였고, 외가는 최소 6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방이었다. 엄마는 결혼 후에 단 한 번도 명절에 외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 멀다는 이유로 일 년에 두어 번 갈까 말까 였다. 다른 집 며느리들은 명절 당일이면 점심 설거지를 하고 외가에 간다고 서둘러 떠났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가까이 사는 아들은 명절이 지나고 쓸쓸히 남겨진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으므로, 그의 딸린 가족은 멀뚱히 앉아 (당연히 며느리가 차린) 당일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생하는 엄마를 돕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자들만 당연스레 겪어야 하는 노동에 나는 단 1g도 일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일을 하지 않았다. 굳이 나를 불러내는 날엔 곁에 있는 다른 사촌들까지 모조리 동원시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조리에 대해서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린 여자애였던 내가 친척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간 엄마가 자식 교육 잘못 시켰다고 욕을 먹겠지, 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부친이 눈을 부라리며 하는 호된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신 친가 행사를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제사와 명절은 웬만하면 온갖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십 대에게 시험공부를 해야 하거나 학원에 가야 한다는 말은 좋은 핑계가 되니까. 가면 빈둥대는 친척들을 보거나, 그들이 엄마를 부려먹는 꼴을 보게 되거나, 뭐든 결국 화가 나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어른) 모두를 상대로 이 구역의 미친년이 될 엄두는 쉽게 나지 않았다.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눈앞에 닥쳤을 때는 혼자만의 힘으로 가부장제의 프레임을 깰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견고한 벽이었다. 엄마는 늘 저러다 내가 어디로 튈까 싶어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부친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여자답게 사근사근 웃으며 친척들에게 미소와 애교를 선물하지 않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친척들에게 나는 항상 좀 까칠하고 별 말이 없으며 잘 웃지 않는 이상한 여자애였다. 그런 내가 비혼주의자가 된 결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며느라기>를 보고, 사람들은 이제야 조금씩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들 내가 겪는 이 불편한 마음은 '나의 문제'라고 했다. 설사 사회의 구조와 제도가 잘못되었다 한들 당장 뜯어고칠 수는 없으니 맞춰서 살아가라 했다. 지금이라도 미묘하게 불편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것들이 실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공론화되는 시류가 반갑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알고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이제는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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