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러면 병이 되니까
하고 싶은 말은 해야 돼, 안 그러면 정말 병이 돼
묻어두고 숨기려 해도, 결국 드러나게 돼 있어
어떤 말들은 꼭 해야 돼, 안 그러면 정말 후회해
솔직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니, 뭐 이런 노래가 다 있지. <테디베어 라이즈>라는 싱어송라이터 우효의 노래다. 처음 듣고선 너무 깜짝 놀랐다. 내 마음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가사라니. 실은 이 노래에서 의미하는 바는 좀 더 로맨스적인 성격에 가깝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한테 중요한 문장은 이거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돼, 안 그러면 정말 병이 돼."
아무렴, 하고 싶은 말은 해야지, 안 그러면 병이 되고 말고.
엄마에게 정기적으로 카톡을 보낸다. 해외에 사는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식의 디지털 안부 묻기 뿐이니까. 비정기적으로 통화를 한다. 얼굴을 까먹으면 어쩌나 하는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쯤 정말 까먹으면 안 되니까. 아니면 카톡에서 보이는 엄마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날, 얼굴을 한 번 봐야 마음이 편하겠다 싶을 때. 그녀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녀와 모든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게 된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겉핥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별일 없지? 응, 별일 없지. 하고.
사실 어릴 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하루의 일과를 떠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건 둘째인 동생의 몫이었지. 책임감만 있지 어리광이나 애교를 잘 부릴 줄 모르는 무뚝뚝한 아이였다.
어떤 말은 부끄러워서, 어떤 건 입에 올리기 불편해서, 어떤 건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리고 또 어떤 말은 그냥 엄마는 몰랐으면 해서, 말을 자주 삼켰다. 보수적인 가족의 분위기에 더해, 나의 부모는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먼저 눈치채고 묻지 않으면 대게는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작게는 살 책을 고르는 것부터, 사춘기와 학원, 입시를 거치기까지 나는 무엇을 부모와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하는 것에 익숙했다. 부친의 간섭에서 일찍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엄마도 내가 한 결정을 웬만하면 믿어주었다. 나쁜 짓만 아니면, 그래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 내 고집도 있었고. 결정에 스스로 책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에게도 부담이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짠! 하고 뭐든 알아서 잘하는 척척박사님이 되고 싶었지.
하고 싶은 말이 막히면 자주 입을 다물었다. 어떨 땐 항의의 표시로. 어떨 땐 정말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그렇게 입을 꾹 다물 때마다, 엄마는 나를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캐묻거나 다그치지 않고 언제까지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입시에 실패하거나 남자 친구와 헤어진 날이면 엄마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입을 다물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어둔 선 너머에서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폭풍 같은 현실이 지나가고 나면, 내 안에서 소화를 끝마치고 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방문을 얼마나 열어보고 싶었을까. 엄마가 얼마나 연락을 하거나 들여다보고 싶었을지를 나는 모른다. 그렇게 해외를 떠돌아다닐 때에도, 어떤 아찔한 순간들이 지나가도, 엄마는 나를 채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서.
https://www.youtube.com/watch?v=GOS6C2jXTa8
하지만 반대로 엄마의 일상이 궁금해질 때면, 집에서 나를 기다리던 엄마의 마음을 상상한다.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던 그녀의 삶이 나 때문에 혹시 더 고단하지는 않았을까. 요즈음 우리는 약 8000km 떨어진 곳에서 노란색의 메신저로 대화를 나눈다. 시집살이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엄마는 살면서 도망치고 싶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메신저 창에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뮤직 비디오 링크를 보내고, 슬쩍 운을 띄운다.
- 엄마는 평생 어디 도망도 안 가고, 어떻게 살았대~
- 내가 왜 도망을 가. 집에 우리 보물들이 있는데.
그녀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묻니, 하는 느낌으로. 동생과 나를 엄마는 자주 보물들, 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정말 다 괜찮았나, 지금 나는 그녀의 지나간 과거를 과대 몰입하고 확대 해석하고 있는 걸까.
힘든 날엔 잠깐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어, 말을 뱉어 보지만 거짓말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찰나라도 엄마가 없으면 집에서 혼자 부친을 맞이하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다 엄마를 찾았다. 그가 예상보다 일찍 삐삐삐삐 현관문의 비번을 누르는 날엔, 비상 알람벨처럼 위-잉 위-잉 다급하게 SOS 연락을 쳤다.
- 엄마, 어디야? 빨리 와. 엄마 남편 왔어.
내가 평생을 풀리지 않은 불편한 기분으로 쳐다보거나 내키지 않는 인사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대신, 엄마가 어이구, 어서 오세요~ 하고 웃으면서 맞아주면, 적어도 그가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나는 권위에 굴복하고 싶지 않지만, 엄마는 하던 대로 그의 비위를 맞춰줬으면 좋겠다.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폭탄 제거반 뒤에 숨듯이, 그녀 뒤에 숨었다. 엄마, 진짜 미안한데, 저 폭탄이 터지면 좀 막아줘, 하는 심정으로 엄마를 쉴 새 없이 불러댔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쓰고 싶었다. 그녀가 내 인생에 너무 커다랗고 깊숙이 박혀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지난 시간을 들춰볼수록 어떤 이기심의 민낯을 들춰내는 기분이 된다. 불편하고 슬퍼진다. 도망치지 못하고 가만 방구석에 앉아서 눈물을 훔치던 엄마의 모습이, 화도 못 내고 혼자 꾹꾹 마음을 참아내던 그 모습이 꼭 나 같아서, 아니면 내가 될까 봐, 다시 화가 난다.
사랑과 미움이 얽혀 목 밑에 막혀있는 것 같다. 이걸 풀지 않으면, 나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아. 그런데도 여전히 엄마 앞에 서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제때 해야 할 말들을 하지 못한 채로 다음 시절로 넘어온 것 같아. 상처에 밴드를 붙이고 다시는 열어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지난 상처를 들쑤시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거기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내 목 바깥으로 타고 넘어오지 못한 말들이 거기 갇혀 있어. 그 말들을 꺼내서, 그걸 들여다 보고, 어떤 부분은 이제 묻어주고 싶기도 해.
그리고 그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