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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Dec 15. 2021

모두 어디로 갔을까?

@ 통영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빨간지붕 집의 왼편에는 풀밭과 언덕이, 오른편에는 밤나무 숲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밤나무를 타고 놀았다. 싫증도 내지 않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곤 했다. 그 밤나무 숲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풀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나무가 가득 뼏어 있었고, 그 옆에 작고 동그마한 비밀 기지가 있었다. 두 세명 정도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수풀 속의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그 안에 웅크리고 있노라면 뭔가 엄창난 작당모의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옆집 형을 따라 토끼를 잡으러 뒷산을 오르기도 했다. 작은 올가미를 만들어 토끼똥이 있거나 털이 묻어 있는 곳의 나무가지나 둥치에 덫을 매달아 놓는 것인데, 불행 중 다행인지 한마리도 잡은 기억은 없다. 다만 가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걷노라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이상한 무늬의 곰팡이와 버섯을 가득 달고 있는 나무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킬 것 같아 발길을 재촉하다 ‘컹’ 하는 소리와 함께 푸드득, 날아오르는 꿩의 날개짓에 깜작 놀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던 기억만은 아직도 선하다. 


밤나무 숲 아래에는 하얀 이층집이 있었는데, 그 곳엔 제법 큰 지하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일러실과 각종 배관들과 함께 공구들이 가득 쌓인 어두컴컴한 창고일 뿐인데, 그곳을 들어갈 때면 꼭 주말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보물을 찾아 지하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매쾌한 냄새와 습기가 가득찬 어두운 지하실을 한 바퀴 휘 돌고 햇살 눈부신 마당으로 나오면 마치 큰 모험에서 돌아온 듯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함께 지어낸 ‘상어 놀이’를 하며 미끄럼틀에서 뛰어 놀던, 수업이 끝나면 누군가의 집에 모여 로봇과 만화 영화 얘기를 하면서 각자 마음 속의 로봇을 가지고 서로 자기가 최강이라고 우기던, 같이 뛰어 놀고, 같이 장난치고, 같이 벌을 받던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패거리의 이름을 짓고, 막연하게 먼 훗날을 꿈꾸던,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연락이 소원해진 그 유쾌했던 녀석들은 다들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렀다. 모든 것이 기억보다는 작고 좁았다. 텅빈 운동장에 서서 그 시절의 꿈들을 되짚어본다. 그 땐 아마 세상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두근거렸겠지. 조금씩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자신이 내린 선택과 주어진 상황에 떠밀려 수많은 가능성의 문들이 하나 둘씩 닫혀간다. 그렇게 어딘가 서글픈 것이 인생임을 깨우치며 우린 지친 어른이 되어 간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철학자 자크 라캉의 생각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 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 *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누구인지도, 자기가 원하는 것도 잘 모른채 남 탓, 세상 탓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어른이라는 존재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던 어른이지만 막상 자신이 되고 나니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말을 듣는다고 큰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딱히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렇게 구질구질한 변명**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건 어딘가 쓸쓸하고 가슴 먹먹하고 부끄러운 일일텐데, 한편으론 어릴 때 자신이 품고 있던 환상이 무너져 내린 그 곳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드러나기도 한다. 무언가를 짓기 위해선 그 형체를 세울 공간이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선 선을 그을 여백이 필요하다. 이제 와 보니 당신의 생이 어린 시절 운동장처럼 텅 비어 있다면, 그저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영화 <키즈리턴>의 마지막 대사처럼 우린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으니까.


"이미 물 건너 간거지?”

"멍청아, 아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나이를 먹어서 되새겨 보면 자신이 몹시도 긴장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드는 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들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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