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소설 | 굿모닝인천 2월, Vol. 338
굿모닝인천 2월, Vol. 338
글 안보윤 │ 일러스트 송미정
겨울은 무겁고 눈은 지겹다. 기준은 끄적이던 문장의 순서를 바꿔보았다. 겨울은 지겹고 눈은 무겁다.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온통 구름이었다. 지상을 향해 낮게 깔린 구름의 잿빛 그림자가 조금 전보다 한 뼘은 가까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굵은 눈발이 날릴 것 같았다. 눈이 내리면 편의점 앞을 빗자루로 꼼꼼히 쓸고 박스를 깔아두어야 했다. 젖은 박스가 얼어 손님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제때 치우는 일도 기준의 몫이었다. 쌓이는 눈은 번거롭고 이미 쌓인 눈은 무거웠다. 무겁고 지겹다. 기준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놓고 흠칫 놀랐다. 그건 기준의 연인이나 친구들이 기준을 떠나갈 때 곧잘 했던 말이었다. 너는 너무 무거워. 이젠 지겹다, 정말.
기준은 낙서하던 종이를 치웠다. 새로 A4 용지를 꺼내 매직으로 크게 ‘왕만두 있음’이라 적었다. 돼지고기와 부추, 당면으로 속을 채운 왕만두는 편의점 인기 제품이었다. 편의점 출입구에 종이를 붙인 기준은 그대로 문을 열어두었다. 눈 내리기 직전의 매캐하고 습한 바람이 거리에 가득했다.
편의점은 미묘한 경계선에 위치해 있었다. 편의점을 중심에 두고 북쪽으로는 가파른 언덕길로 이루어진 재개발 예정지가, 남쪽으로는 재개발이 끝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자리했다. 동쪽은 1인 가구 대상의 오피스텔이 빼곡했고 서쪽은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즐비했다. 편의점 사장은 이를 두고 뒤죽박죽이라 말했다. 고객층이 뒤죽박죽이라 물건 발주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임플란트에선 어른 손님이 안 와. 그쪽은 다들 온라인몰에서 배송시킨단 말이지. 행사 물품 사러 십대 애들이 온다 싶음 대충 임플란트 애들이구나 하면 돼.”
임플란트요? 기준이 묻자 사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단순하게 생각해. 북쪽에 다 무너져가는 동네 보이지? 거긴 충치동. 남쪽에 싹 갈아엎은 동네는 임플란트동.
동쪽은 반쪽짜리니까 땜질동. 서쪽은 뭐, 그냥 동네지.”
사장의 말대로라면 기준은 충치동에, 사장은 임플란트동에 사는 셈이었다. 기준은 처음 아르바이트하러 왔을 때 사장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곱씹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눈이 내리기 직전, 충치동으로 난 가파른 언덕길을 올려다볼 때 그랬다. 일이 끝날 새벽 무렵이면 저 언덕은 꽁꽁 얼어붙은 눈길로 변해있을 게 뻔했다. 기준은 낮게 한숨을 쉬다 머리를 털었다. 무거워지지 말자. 언덕이든 골목이든 길은 길일 뿐이었다.
기준은 플라스틱 그릇 두 개를 꺼냈다. 하나에 미지근한 물을, 다른 하나에는 고양이용 습식사료를 담았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편의점에 나타나는 얼룩이를 위해서였다. 얼룩이는 지난주부터 편의점 주변을 어슬렁대기 시작한 길고양이였다. 비쩍 마른 몸통에 검은 얼룩이 듬성듬성 찍혀 있었는데 머리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컸다. 둥그렇고 넓적한 얼굴에 뒤통수는 알전구처럼 동그래서 실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기준은 얼룩이가 귀여웠다. 편의점 앞을 쓸고 있을 때나 배달 온 물품을 창고로 옮기고 있을 때 얼룩이는 기준의 다리에 슬그머니 몸을 붙여오곤 했다.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꼬리로 톡톡 건드리는 얼룩을 기준은 매일 저녁 기다리게 되었다. 가볍고 무심한 듯 상냥하고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얼룩을 도무지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였다.
밥그릇을 실외기 옆에 내려놓자 골목에서 얼룩이가 톡 튀어나왔다. 여전히 넓적하고 커다란 얼굴이었다. 어휴, 진짜 못생겼네. 지나가던 남자가 얼룩이를 보며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룩은 기준의 손에 통통한 뺨을 두어 번 부빈 뒤 그릇에 담긴 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기준은 남자에게 얼룩은 못생긴 고양이가 아니라 상냥한 고양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따뜻하고 상냥한 데다 시간을 아주 잘 지키는 고양이라고.
“너는 너무 촌스러워.”
지난달 헤어진 기준의 연인은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기준이 유기견 보호소에 산책 봉사를 다니고 싶다고 말하자 대뜸 해온 말이 그거였다.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긴 한 거야? 기준이 너 벌써 대학 3학년이야. 남들은 정신없이 스펙 쌓고 자격증 따고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때에 넌 기껏 한다는 소리가 봉사 활동? 그것도 버려진 개들을 돌보겠다고? 그게 네 미래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 넌 좋은 사람이긴 한데 답답하고 좀, 지겨워.”
연인은 한심하다는 듯 테이블을 손끝으로 탁탁 내리쳤다. 기준은 연인의 말보다 그 행동에 더 상처받았다. 그건 지도교수가 기준을 연구실로 불러 곧잘 하던 행동이었다. 교수는 손에 끼운 볼펜 끝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하곤 했다. 정직한 학생, 그거 좋지. 말 잘 듣고 고지식한 학생? 교수 입장에선 그것도 참 좋아. 그런데 회사에서도 그런 걸 원할까? 융통성 없고 착하기만 한 구닥다리 인간을? 교수는 기준에게 여러 번 요령 좋게 굴라고 충고했다. 이런 학생에게는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기준은 얼룩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요령 좋은 인간이란 건 대체 뭘까. 연인과는 헤어졌고 인턴 면접을 위한 교수추천서는 결국 불발됐다. 착하고 정직하면 안 된다니 그게 뭐야. 그게 왜 촌스럽다는 거야. 머리 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굵고 뚜렷한 눈송이였다. 눈송이들은 사륵사륵 소리를 내며 가볍게, 저마다의 궤도를 그리며 내려앉았다. 기준은 빈 박스를 들고 나와 넓게 펼쳤다. 편의점 출입구 앞에 줄줄이 박스를 깔아놓고, 마지막으로 작은 박스를 하나 더 들고 나왔다.
직사각형 박스 옆면에 구멍을 뚫었다. 얼룩이 머리만큼 크고 둥그런 구멍이었다. 상자를 실외기 옆에 내려놓고 편의점에서 파는 3천 원짜리 담요를 안에 깔았다. 기준이 오갈 때마다 몸을 부벼대던 얼룩이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발랑 드러누워 온몸을 담요에 문지르며 기뻐했다. 기준은 그런 얼룩의 모습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고작 이 정도 호의만으로 얼룩은 눈을 맞지 않아도 됐다. 얼룩이 사소한 온기를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기준의 일상은 다정해졌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요령 좋고 계산적인 인간이 아니라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인간으로 살면 안 되는 걸까. 기준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골골대는 얼룩이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담요 속 얼룩이는 거리를 떠돌 때보다 한층 더 따뜻해져 있었다.
“앗, 얘가 왕만두인가 봐!”
진열대를 정리하던 기준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왕만두를 사러 온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앳된 걸 보아 학원 야간수업을 가는 임플란트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준이 계산대에 다다를 때까지 편의점 문은 열리지 않았다. 기준은 목을 길게 빼 유리문 너머를 살폈다. 기준이 만들어놓은 고양이 상자 앞에 교복 입은 학생 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만두야, 왕만두. 만두 이리와 봐. 학생 하나가 구멍 안쪽을 향해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기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리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문에 붙여두었던 A4 용지가 언제 떨어졌는지 고양이 박스 앞까지 날아가 있었다. 얼룩이 머리만 한 구멍 아래 ‘왕만두 있음’이 커다랗게 써 붙여진 셈이었다. 학생들이 열심히 왕만두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기준은 한참을 웃었다. 기준의 웃음소리가 조금도 지루할 새 없이 자신만의 궤적을 따라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떠올랐다. (*)
안보윤 | 1981년 인천 출신.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7의 고백>,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밤의 행방>, 중편소설 <알마의 숲>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