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금과옥조처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미디어에 비친 의사의 이미지는 과거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회 지도층의 이미지에서 최근에는 권위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기적인 집단의 이미지로 종종 그려진다. 과거 절대적 위상에서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전문 직업인 정도의 이미지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이기에 아파서 의사 앞에 서면 일반인들은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의사의 권위에 짓눌리게 마련이다. 과거 신성하다 싶을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고 사회의 최정상에 군림했던 의사들이었기에, 그런 집단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을 기대한 드라마가 "라이프"이다. 그런 기대를 하게 된 것은 작가의 전작인 "비밀의 숲"에서 보여준 작가의 역량 때문이었다. 비밀의 숲이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향후 한국 드라마는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감히 판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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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에 이수연 작가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비밀의 숲에서 작가가 까발렸던 대한민국 권력의 실체, 즉 검사와 언론과 권력자들 간 얽히고설킨 그 지저분한 연결고리를 이제 또 다른 성역인 의료계에 들이대어 까발릴 것이라 기대했다. 드라마 초반에는 그런 기대가 한껏 충족되었다. 의료계의 추잡한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질 듯했다.
그런 기대는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 종반으로 접어들며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물론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 공식인, 전문 의학 드라마를 표방한 의사나 간호사의 연애담은 아니었고, 의료계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와 통찰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마무리는 아쉬웠다. 전작인 비밀의 숲이 한국의 권력 현실을 검사라는 집단을 통해 냉정하고 철저하게 파헤치고, 이들이 어떻게 공고한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했고,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냈던 것에 비해, 라이프는 의료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팡질팡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썩은 의료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의사라는 권위 뒤에 숨겨진 추잡한 권력 투쟁과 기득권에 안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술의 현실을 뼈아프게 보여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결론은 이도 저도 아닌, 타락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나름대로 현실 속에서 의료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결말로 맺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출중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작가의 각본에 있다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의 현실과 의사들의 속물적 속성을 파헤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환자들을 위해 뭔가 보여줄 것 같던 드라마는 중반 이후에는 엉뚱하게 재벌과 의사들 간의 뜬금없는 대립으로 이어지더니, 결국에는 아무것도 해결된 것 없이 끝난다.
비밀의 숲에서도 결말은 결국에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과정에서 검찰과 재벌과 정치인과 언론과 그리고 기타 이 땅의 모든 특권층들 간의 공생 고리를 통렬하게 까발린 후인지라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라이프에서는 굉장히 무기력한 체제 순응이 결말에서 암시되기에 김이 빠진다.
비밀의 숲에서 검사들은 권력을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권력 추종자들임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정의를 위해 나선 극소수의 검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결국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철저하게 시스템에 복종하는 것처럼 지내다가 자신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버리는 것으로 얼마나 검찰이 타락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밀의 숲 검사에게는 이런 처절함이 있었는데, 라이프에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처절함이 보이지 않는다. 의사들은 고작해야 갈등하는 존재이고,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는 암시까지 들어간다. 처음 드라마 도입부에서 의료계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발릴 듯 씩씩했던 기세는 후반부로 가며 의료인들은 자본주의 논리의 희생양이라는 식으로 흘러간다.
의료계의 어두운 면을 직접 겪어봤기에, 그런 이면을 영향력 큰 TV 드라마에서 다루어줘서 실상을 알리고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런 기대가 무산되었기 때문에 실망감도 컸다.
비밀의 숲이 보여준 매력은, 검사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고 권력을 위해 온갖 불법을 서슴지 않는, 아니 자신들이 곧 법이니 검사 자신은 초법적 존재라는 오만으로 뭉쳐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적시하는 데서 오는 냉철함이다. 냉랭하게 표현한 이 현실은, 그렇기에 보는 사람들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소시민들이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곱씹어 보게 만들고, 힘 있는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제멋대로 요리하고 있는지 각성하게 만든다. 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좌절감이 들더라도 그런 각성 자체를 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것은 비밀의 숲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비밀의 숲이 한국 드라마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한국 드라마는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었던 이수연 작가의 후속작이 또 다른 절대 권력 집단인 의료계의 실체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비밀의 숲이 짚어낸 사법부의 검은 실체는 재판 거래가 현실로 드러나며 드라마가 현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도 사법부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뻔뻔하게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영장 기각을 남발하고 있다. 그러니 비밀의 숲은 드라마 같은 현실을 드라마로 만들었던, 빼어난 수작이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밀의 숲이 보여줬던 탁월함을 기억하기에 같은 작가의 "라이프"에 거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것일까. 의료계의 치부를 드러내어 또 다른 성역의 실체를 까발려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비록 의사들은 정치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기술을 가졌기에 의사는 커다란 권력을 가졌다. 그들이 그 권력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백색 가운 뒤에 감춰진 어두운 치부를 충분히 파헤쳐주기를 바랬던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연 작가가 권력층에 메스를 들이대는 시도는 높이 평가한다. 그런 시도가 계속되어 더욱 진화한 드라마가 탄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