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모두의 잘못
사건은 분명히 있었다
찢어진 종이처럼
현장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 이름 모를 비명이 스며 있었다
규정은 매뉴얼 속에서
아무 죄도 없이 잠들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지시대로 했습니다”라는 말뿐이
자판처럼 반복되었다
“그건 제 권한 밖이에요”
“위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그냥 절차대로 움직였을 뿐이오”
벽지처럼 말들이 덧발라졌다
누구의 입이든 상관없이
책임을 지우는 데에
모두가 정확히 훈련되어 있었다
그날 무너진 건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었고
그 파편은 아무도 닿지 않는 곳까지 흩어졌다
그래서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모두가 기억에서 떠나갔다
잘못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잘못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치 진짜 몰랐다는 듯
우리는 또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엔... 누구 탓인가요"
"책임이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누군가를 지목하기보다는
모두를 피하는 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건은 있었고,
상처도 있었고,
지워지지 않는 결과도 남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소관이 아니고,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절차대로 했을 뿐이라고,
모두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도 벌 받지 않았고,
모두가 그 기억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책임질 사람은 없는데,
왜 늘 누군가는 다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걸까요?
그 책임의 무게는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
가장 시스템 밖에 있는 사람에게
결국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익숙한 회피의 구조를
가만히 들춰 봅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죄를 짓는 구조,
침묵과 반복으로 면죄부를 받는 방식,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오면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고개를 돌리는지를 말입니다.
당신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이고,
당신이 외면하는 것은 누구인가요?"
"이번엔... 누구 탓인가요?"
그 물음에,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