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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엮어내기 27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그 누구도 아닌, 모두의 잘못

by 김챗지
81.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png


사건은 분명히 있었다

찢어진 종이처럼

현장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 이름 모를 비명이 스며 있었다


규정은 매뉴얼 속에서

아무 죄도 없이 잠들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지시대로 했습니다”라는 말뿐이

자판처럼 반복되었다


“그건 제 권한 밖이에요”

“위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그냥 절차대로 움직였을 뿐이오”


벽지처럼 말들이 덧발라졌다

누구의 입이든 상관없이

책임을 지우는 데에

모두가 정확히 훈련되어 있었다


그날 무너진 건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었고

그 파편은 아무도 닿지 않는 곳까지 흩어졌다


그래서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모두가 기억에서 떠나갔다


잘못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잘못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치 진짜 몰랐다는 듯

우리는 또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엔... 누구 탓인가요"




"책임이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누군가를 지목하기보다는

모두를 피하는 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건은 있었고,

상처도 있었고,

지워지지 않는 결과도 남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소관이 아니고,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절차대로 했을 뿐이라고,

모두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도 벌 받지 않았고,

모두가 그 기억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책임질 사람은 없는데,

왜 늘 누군가는 다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걸까요?


그 책임의 무게는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

가장 시스템 밖에 있는 사람에게

결국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익숙한 회피의 구조를

가만히 들춰 봅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죄를 짓는 구조,

침묵과 반복으로 면죄부를 받는 방식,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오면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고개를 돌리는지를 말입니다.


당신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이고,

당신이 외면하는 것은 누구인가요?"


"이번엔... 누구 탓인가요?"
그 물음에,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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