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
결혼하고 나서 첫가을, 첫 한가위
철대문을 연다. 내 마음처럼 삐거덕 삐그덕 듣기 싫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사이로 한발 들어서면 포도향이 가득했다. 저녁 추위를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 건강한 초파리들이 수십 마리가 내 얼굴 앞에 들이민다. 얼굴 앞을 손사례를 치며 들어가면 비로써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나뉘지 않은 포도들이 든 노란 컨테이너 박스에 있고, 생산지와 생산자가 찍힌 포도박스가 있다. 석면 지붕 시골집에 갑자기 생긴 노란 기둥의 웅장함 그 사이사이 분주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나를 한번 훑어보곤 [왔어요?!] 하곤 다시 일을 한다. 넣었다 뺐다 무게를 달았다 하는 손길과 수술방에 들어선 의사들처럼 쪽가위를 들고 터진 포도를 잡아내고 휴지로 닦아내는 사람들. 그들은 해보겠냐도 하라고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짐을 풀고 그 공간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다 들어갔다. 달이 밝았다. 나는 너무 심심해 포도 박스를 접어 쌓아 두었다. 박스를 너무 많이 접어도 쌓아놓을 공간이 없어서 계속 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넉넉한 한가위라고 하는데 집안에 풍요롭게 많은 것은 포도뿐이었다. 내 기준으론 평소보다 못한 저녁상에서 젓가락을 빨아먹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입이 짧았나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쌀알 하나하나를 씹었다. 내일모레면 나올 뱃속의 아이가 차는 발길이 맛난 것을 왜 안주냐는 발길질 같아서 속상했다. 추석 당일에 제사가 끝나자마자 안동 헛제삿밥처럼 밥을 나물에 비벼 먹었다. 아무도 상에 올라간 고기와 조기를 꺼내주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친정에 돌아가는데 시아버지가 노란색 컨테이너 두 개를 실어주셨다. 그저 가고 싶은 마음에 뭔지도 모르고 후딱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까지 꾸역꾸역 컨테이너를 들고 올라왔다. 허리가 아팠다. 현관문 앞에 놓고는 잊어버리다가 다음날 보니 포도였다.
상중하가 섞인 하만 있는 각각 1개의 포도 컨테이너였다. 컨테이너 사이로 건강한 날파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와 식구들이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친정동네도 포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역이다. 이것을 돌리기엔 너무 하가 많다. 나눠먹자 하고 욕먹을 수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지역사람들이 아닌 사람은 사무실 사람들이 선택되었다. 좋은 아이들만 골라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 중을 주겠다고 나한테 남은 건 주먹만 한 아이들만 남았다. 아버지 건강원 하실 때 즙을 짜내던 크기 고만한 아이들을 먹었다. 먹다가 다 먹지도 않았던 것 같다. 투덜거리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쁜 것만 먹는 다는데 예쁜 것만 본다는데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한참이 흐른 4년 뒤 둘째 아이 출산 때도 달라지진 않았다. 점점 어이가 없다가 또 화가 났다가 무덤덤 해졌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돌 쯔음 다시 이 풍경 속에 유난히 마르고 마르셨던 아버님은 없다. 다리를 꼬아 앉아 티브이를 보시던 과묵했던 아버님은 이젠 없다. 아버님은 없지만 그래도 이 컨테이너에 찍힌 이름으로 매해 아버님을 만난다. 아들만 넷을 키우셔서 딸은 모르시던, 막내아들이 제일 먼저 결혼하겠다며 데려온 기 쎈 며느리에게 늘 미안하다 사과하셨던 아버님을 만난다. 대접받지 못하면 억울해했던 그때 나는, 살면서 더 내 그릇을 찾는 중이지만 가끔 나완 다른 사람과 다른 풍경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꼭 그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