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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소리와 듣는 소리

소리 취향

by 랑랑

회사에 있으면 최신곡들을 끊임없이 듣는다. 템포가 빠르고 때론 가사가 잘 안 들리는 음악들. 그런데 아침 10시부터 6시까지 몇 바퀴씩 몇 주 반복해서 들으면 몇만 시간의 법칙처럼 후렴구를 중얼거리는 날 발견한다. 내 취향이 아닌데 하면서도 손으로 볼펜을 빙글빙글 리듬을 타거나 아주 작게 입을 빼꼼거리며 따라 하는 걸 발견할 때마다 참 낯설다. 덕분에 집에 오면 음악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집중이 안 되는 것은 나이 먹은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음악 탓에 더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더 음악 탓을 했다. 그래서 음악을 꺼보았으나 3일도 못 갔다. 나는 활자중독만큼이나 청취중독도 있는 것 같다.


L의 차를 타면 늘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그놈의 클래식은 곡명도 누가 쳤는지도 매번 헷갈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아는 척할 수도 없으니 어느 날은 모르겠다고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막 귀에 이게 다르다며 사계 오리지널과 현대적 해석을 들려줬는데 아 그 정도 못 걸러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었는데... 여하튼 요즘은 쪼금 알 것도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막귀다. 구분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 듣는 것들이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 21번, 쇼팽의 폴로네이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3번 그리고 바흐의 골든베르크. 바흐의 골든베르크는 손민수 교수님의 명동성당 버전을 제일 좋아한다. 여전히 피아니스트 분간은 어렵지만 조성진과 임윤찬은 우아하고 청량하며 나는 이만큼으로 족하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듣고 싶은 것들을 듣다가 아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청취권을 빼앗긴다. 아들은 찰리푸스와 부르노마스, 페더 엘리아스를 좋아한다. 나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져준다. 김어준으로 시사영역을 넓혔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팝을 좋아하는 것이 너의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행복하다고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하는 가사와 리듬에 알레르기가 있다.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세뇌하는 느낌이라 내 사전엔 새마을운동노래라고 구분되었다. 90년도 주영훈 표 가사와 음악은 나랑 맞지 않는 옷만 같아서, 덕분에 김동률과 서태지와 신해철을 들었다.

시간은 지나고 내 윗세대 언니들과 아쿠아로빅을 하다 보니 나름 새마을운동 풍의 노래들이 나쁘지 않았다. 운동을 하기에 또 신나게 듣기에도 적정한 템포.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 시선과 태도.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공감대. 긍정적인 면이 보였다. 음악을 바둑돌 마냥 흑과 백으로 나눠둔 내가 좀 계면쩍여서 코요테의 투게더를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 두고 한 번씩 찾아 듣는다. [신지의 목소리는 수영장에서 들으면 환상이다.] 알레르기는 사라졌지만 입맛에 맞진 않는 걸 보면 기호라는 건 참 무섭다.


그러고 보니 음악만큼 김어준의 겸공과 알릴레오 북스도 많이 듣는다. 지대넓얕도 가끔씩 찾아 듣는다. 심우도 얘기 정말 좋아한다. 옹기종기한 수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좋다. 그러고 보니 김어준의 자기 연민도 피해의식도 없는 호탕한 웃음도 좋아한다.


요즘 세상 제일 싫어하던 달리기를 한다. 갑천을 달린다. 뛰려니 종전에 좋아하던 음악으론 뭔가 몸이 맘껏 움직이질 않아서 회사 가서도 듣는 음악들을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두었다. 평생 들을 일 있겠냐 생각한 최신가요를 찾아 듣는다! 아이브, 르세라핌, 제니, 에스파, 데이식스를 들으며 뛸 때마다 내가 참 낯설다. 평생 뛰고 싶은 욕망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손은 가볍게 앞뒤로 움직이고 발을 구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은 3분 뛰고 2분 걸어가는 5번의 세트가 전부이지만 이 단순한 행동으로 아침이 조금은 기쁘다. 내게서 분출되고 있는 땀과 차오르는 가쁜 숨 그리고 웃는지 우는지 모르겠는 내 표정들을 인지할 때마다 뿌듯하다.

듣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의 세계에서 안 변하고 싶었다. 늘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바보 같아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중에 나도 하나이길 늘 기도했는데, 결국 엎치락뒤치락 받아들이고 변해가고 있다.

낯선 나.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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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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