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이의 일기 2 [아쿠아로빅 어린이]
땅엔 중력, 물엔 부력이 있는데 내 몸은 부력을 모른다. 진부한 물공포 탓이다. 아래로 아래로 당겨지듯 꺼지는 상황의 두려움.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답답함.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절망. 내 힘으론 나갈 수 없는 무력감.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맘대로 되지 않았다. 호흡이 되지 않고 허약한 팔과 다리는 물에 흐느적거리고 두려움이 몸을 경직시킨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이 없으니 물속에서 어정쩡한 기립자세가 되곤 한다. 내 몸이 강하지 못해서였을까? 내가 날 믿어주지 못해서였을까? 노력한다고 하는데 해내지 못하고 실패가 반복되면 그 누구보다 스스로 믿어주기 참 어렵다.
퇴사하기 1달 전부터 백수 준비를 했다. 서랍 한 칸 한 칸 비우고 닦았고, 컴퓨터의 즐겨찾기와 파일들도 깔끔히 삭제해 두었고, 출력물들도 파쇄해 두었다. 그러고 나서 백수의 하루를 설계했다.
높은 연령, 트로트 리믹스에 묘한 거리감이 있었지만, 이미 하고 있던 L의 경험담과 발이 닿는다! 는 생각이 들자 문턱이 낮아진다. 수영도 아니고 까짓 해보자!
동네 주민센터, 여성가족원, 수영장 접수 날자를 확인했다. 각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신청을 하고 발표날을 기다리는데 수영장만 오로지 현장접수라 새벽에 줄을 섰다.
새벽에 만나는 사람들은 밝고 좋다. 누워있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다독여서 움직여 나온 상기되어 있는 에너지. 얼굴에서 넘쳐 나오는 밝은 기운은 기분 좋은 전이가 된다. 1시간쯤 줄을 기다려서 캠으로 사진을 찍고 수영장 카드를 발급받았다. 아쿠아로빅은 이렇게 일찍 오실 필요까진 없는데 고생하셨다는 덕담도 들었다. 출근길 조금 피곤했지만 기분이 그렇게 좋았더랬다. 백수 생활계획표를 바라보고 뿌듯했다. 출석 잘하면 스스로에게 선물해 주자고 다짐했다.
부력이 없을 리 없다. 물속에서 수많은 동작을 하면 물에서 느껴지는 저항력과 부력으로 내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저항력과 부력 사이에 발버둥 치느라 물도 몇 번 먹었다. 그렇다 아쿠아로빅을 하다가도 물 먹는 나다. 그래도 많이 아주 많이 물과 친해지고 트로트 리믹스랑 친해지고 주영훈표 노래와도 화해했다. [이건 조만간 다른 챕터로 써볼 생각이다] 아쿠아로빅을 하며 어류가 나의 선조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도 해보았다. 수륙양육차처럼 내 코나 귀 옆에 아가미도 남겨놔 주지 투정도 해보고 아 꼴 보기 싫겠는데 하며 고개를 가로 젔기도 했다.
아쿠아로빅 수업을 9개월 들었다. 스스로의 생활계획표를 보며 아무도 모르는 소속감을 느꼈다. 이름도 모르면서 언니라는 호칭으로 시작하는 인사와 가벼운 대화 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는 끝까지 립싱크 모드로 운동했지만, 언니들의 가벼운 흥얼거림과 힘찬 구령소리와 함성소리를 들을 때마다 묘하게 뭉클했다. 이름 써져있지 않지만 물 가운데 있는 내 자리. 지각해서 내 자리 아닌 딴 자리에서 하고 있으면 자리 챙기하라고 토닥여준 언니들 너무 감사했다. 샤워부스 못 잡아 헤매고 있으면 끝났다고 자리 넘겨준 언니들 정말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고맙다. 9개월 간 아쿠아로빅 분기별로 출석도 잘해줘서 그리고 핑크색 캡모자와 새로운 수영복 셀프선물 약속도 잘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
삼신할머니께 물공양을 올리며 아침을 시작한다. 브리타에 물을 내려받아 물 한 컵을 마시고 쌀을 씻고 국을 끓인다. 외출하며 마실 작은 텀블러에 물을 담는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세수를 한다. 내 몸에 물은 30프로를 차지하고 나는 틈틈이 물을 마시고 마시고 마신다. 언젠가 다음번에 또 백수가 되면 그때는 수영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잘 배울 거 같은 망상을 해보다가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내게 배신감도 느껴본다. 물 한 모금 들이킨다. 눈앞에 컴퓨터 명함 내 자리. 내 의자에 앉아 중력을 느끼며 물 한 모금을 다시 삼킨다. 다시 아쿠아리움을 하고 싶다. 익숙한 음악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동작 몇 가지가 생각난다. 선생님의 큰 눈이 생각나고 옆자리 언니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하지만 아주 아주 오랜 뒤에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