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
엄마가 된 친구들은 1박 2일 모임을 위해 전날부터 바빴다. 한겨울 따뜻하게 입느라. 짐 챙기느라. 약속시간을 확인하느라. 숙박장소 확인하느라. 아이들 먹을거리 준비하느라. 난 카레 한솥 끓여두고 나왔고 또 다른 친구는 국, 과자, 빵, 배달음식 등을 준비해두었다. 그 얘기 끝에 수박이 빼꼼 나왔다. 수박 한 통 다 깍둑썰기해두었다는 또 다른 친구의 말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무릎담요를 덮고 어깨에 숄을 걸치고 뜨거운 차를 한잔씩 하던 그 테이블에서 갑자기 차갑고 빨갛고 달콤한 과육을 상상한다. 마른침으로 빨간 과육을 삼킨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도 해놓을걸!
수박 좋아한다.
수박을 이빨이 아닌 입천장과 혀로 눌러 먹을 때 청량하게 무너지는 느낌이 너무 좋다. 더워서 힘든 여름이지만 냉장고에 반찬그릇 가득 깍둑썰기해놓은 수박을 생각하면 기운이 난다. 빨간 네모 반듯한 달콤하고 청량하며 통통한 수박. 사랑한다. 여름은 더워서 싫지만 수박은 좋다. 수박이 좋아서 그나마 여름을 견딘다. 수박은 무겁지만 무거워도 기운낼 수 있다.
호군은 어렸을 때 이마트 수박 코너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알바경력으로 맛있는 수박을 골라달라고 하지만 늘 하는 대답은 똑같다. [수박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마트에서 손님들이 물어볼 땐 어떻게 한 거야? 되물으면 [신중하게 두드려보는 거야! ]라고 대답했다. 돌파리 같은 대답이 늘 웃겼다. 거기에 포도 농사짓는 집에서 상중하도 못 가리는 똥손이 수박을 팔았다는 사실이 더해져 어이도 없었다. 하지만 해마다 몇 번째 수박인지 셀 수 없이 살 때마다 그리고 반절을 쪼갤 때마다 그 말이 옳았구나 생각한다.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게 두근거림을 선물한다는 사실을 수박 너는 알까? 이미 달콤한 수박은 알고 있지만 또 만날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니까. 또다시 달콤함을 만날 것이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감을 다해 수박을 쪼갠다. 흥부도 두 번째 박을 쪼갤 때 이러했을까? 나 역시 너의 달콤함은 알고 있단다!! 꺄!!! 달콤함을 기다리는 내 맘을 너는 알까?
수박수박수박수박을 계속 말하다 보면 박수가 되는 것도 좋다. 박수박수박수박수를 계속 말하다 보면 수박이 되는 것도 좋다. 수박을 통통통 두드리면 박수를 쳐주는 것 같아서 좋다. 수박. 박수. 가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좋다. 더운 여름 수박을 먹으면 기운이 난다.
내 뱃살에 지분 넉넉한 두 아들들은 내가 다른 것을 먹지 않았는데도 식성이 다르다. 된장을 한 녀석은 국물만 다른 녀석은 건더기만 먹기도 하고 계란은 말이만 찜만 먹기도 한다. 그런 그 두 분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수박이다.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수 없이 좋아한다. 부른 배를 안고 퇴근하면 냉장고에 엄마가 챙겨놓아 준 반찬, 국 그리고 수박이 날 기다렸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엄마들이 다 그러고 애 낳는다 유난 떨지 말란 매정한 말을 들어도 수박을 베어 물면 엄마 사랑의 앞면이 느껴졌다. 나한테 모질게 뱉어놓고 후회했을지 아님 홀가분했을지 묻진 않았다. 축사 한켠 싱크대에서 우유갑 도마 위에 수박을 자르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유갑 도마에 연홍빛 달달한 수박물이 든다. 그 위에 통 수박을 반찬그릇 크기에 열과 오를 맞춰 넣어진 계산된 엄마 마음의 앞면. 그러고 보니 두 아드님들 무한한 할머니의 사랑을 탯줄을 통해 당연히 느끼며 자라왔겠구나. 그래서 우린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어!
엄마 생각을 간간히 하며 나도 수박을 자른다. 난 대충 마구잡이로 수박을 자른다. 서둘러 반찬통에 우르르 부어 냉장고에 넣는다.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차갑고 시원하게 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하교하고 수박 먹어라 소리가 무색하게 챙챙 포크 부딪히는 소리 요란하다. [엄마 한 번에 여러 개 찍으면 반칙이야. 엄마 맛있는 부분만 먹지 마.] 아이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좋다. 먹기 힘들게 포크로 싸워도 좋아하는 것을 나눠먹는다는 것이 좋다! 냉장고에 썰어놓은 수박을 보는 것 만으로 부자 같아 좋다. 텅 빈 반찬통을 보고 또 썰어놔야지 하는 별거 아닌 다짐이 금괴 쌓아둬야지 정도의 부유함 같아서 좋다.
6월. 여름이다.
청과상 한편에 드림케쳐처럼 매달려있는 수박끈을 본다. 파랗고 노란 끈의 꼬임 그리고 끈에 무게를 덜어줄 청록색 플라스틱 손잡이 장식까지 오늘 밤 달콤한 꿈을 꾸게 도와줄 것만 같다. 청과상의 달콤한 과일 부적일까? 오늘 밤 아이들은 배뇨를 몇 번 느끼고 잠에서 깰까? 나는 어떤 달콤함에 허구적 거릴까? 어릴 쩍 시골집 이모와 쇼쇼라와 함께 있던 그때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갑자기 초대를 받지도 않았는데 연락 없이 너희 집 앞에 가고 싶다. 어디쯤부터 8kg 한 덩이는 가볍게 들고 갈 수 있을까? 집 앞에 과일가게가 없으면 어떡하지? 여기부터는 너무 먼 것 아닐까? 뭐 이런 고민들을 하다가 여기부터는 괜찮아 까짓 들고 가지 하며 호기롭게 수박 한 덩이를 들고 가고 싶다. 수박끈에 동동 통통 묵직한 수박 한 덩이 진자운동을 느끼면서 걸어갈 것이다. 너를 만나면 기쁘겠지만 집엔 네가 없어도 괜찮다. 압도적인 허무함을 사랑하는 내가 문 앞에 절망하지 않은 것은 수박의 달콤함이 날 대신할 테니까. 널 곧 만날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날 초대할 생각이 없으면 우리 여름모임 한번 하지 않을래? 내가 숙소 근처에 과일가게까지 섭외해서 큰 수박 한번 질리도록 먹어보자. 밤새 그간 근황토크와 요즘 뭘 보고 읽고 하는지 아이들은 얼마나 컸는지 달콤하게 이야기 나눠보자. 우리 달달한 여름밤을 보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