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2

시골흙집

by 랑랑

집 1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시골집에서 유일하게 아빠의 손이 닿지 못한 곳이 있었는데 바로 아랫채에 구들장이었다. 구들장의 원리를 아무리 이해해도 이해하는 것과 해 낼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돌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면 깔아가는 능력과 그리고 위에 황토 마감은 아빠의 능력 밖이었다. 아빠는 동네 어른들께 물어물어 구들장 장인 할아버지 두 분을 모셨다. 두 분은 무너져가는 황토 구들을 들어내고 살릴 수 있는 돌은 재사용하고 어려운 건 밖으로 빼냈다. 돌을 간격 맞춰 깔고 황토 미장으로 바닥을 정리하고 가셨는데 이틀뒤 다시 오셔서 불을 손수 지펴주셨다. 바닥이 뜨끈뜨끈했다. 구들장 입구에 큰 솥을 걸었고 고구마를 구워주셨던 초 겨울 참 따뜻했다. 겨울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살짝 문을 열어놓으면 아래는 뜨끈하고 위는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깨워주는 게 너무 좋았다. 어떤 날엔 불을 열심히 때서 장판이 타기도 했다.

아랫채에 솥이 걸리자 엄마는 원래 집에서 쭉 해왔던 것처럼 콩을 끓여 메주를 쑤고 간장과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집 장독대에 크고 작은 항아리가 진열되었고 간혹 올해 장맛은 별로인 것 같다는 엄마의 투덜 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엄마는 금세 동네 평범한 아줌마들처럼 장을 담그고 놀러 온 친지들에게 장을 싸 보내기도 했다. 늦가을 메주를 쒀내며 주문처럼 외우던 아이고 허리야 같은 아픔과 힘듦을 나눠먹는 음식 속에 보내셨던 걸까? 아니면 맛있다는 인사치레에 잊으셨던 걸까? 이해할 수 없지만 시간은 여러 가지를 도전하게 했고 그럭저럭했던 자기만족과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기도 한 것 같다.

시골집을 좋아하고 좋아했지만, 겨울을 유난히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것도 시골집 덕분이다. 흙집 특유의 웃풍으로 코감기를 달고 살았고 비염까지 있었다. 기초체온이 낮고 수족냉증도 있었지만 겨울에 집에만 있는 건 너무 싫어서 겨울 산과 논으로 놀러 나가 동상에 걸려와서 손마디가 벌겋게 부풀어올라 울기도 했다. 동상 걸린 손에 얼음 기를 빼준다고 이상한 민간요법 알아와서 밤새 내 손을 만지작 거려준 엄마 그리고 할머니. 안 될 줄 알았는데 정말 있었던 효과. 엄마한테 혼나서 혹 놀 친구도 없으면 집에서 동생이랑 놀다가 싸우다가 웃다가 울다가 하기도 했다. 겨울은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고 식탁도 단순하게 만들었다. 물론 엄마의 음식 솜씨는 훌륭했고 물론 맛있게 잘 먹었지만 선택권이 없었기에 지겹기도 했다. 덕유산 아래 마을의 겨울은 길고 또 길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내렸고 안테나 위에 내린 눈은 티브이마저 잘 나오지 않게 했다. 라디오를 켜서 저 건너편의 즐겁게 행복하게 방송하는 디제이의 따뜻함과 웃음을 질투하기도 했다.

그래도 수족냉증 있던 내게는 불 때는 아랫채는 너무 천국 같은 곳이었다. 평범한 격자 창살에 발려있던 창호지를 통과하는 겨울 햇살, 온갖 틈으로 들어오던 겨울바람, 처마 아래 고드름, 밤새 내린 눈, 언제 이 눈이 다 녹을까 걱정했던 남덕유산 봉우리.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서 앞으로 뒤로 몸으로 온기를 꽉꽉 담아보려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 뒹굴거리며 신선 놀음하듯 바라보던 풍경들.


그래도 봄, 여름, 가을은 불편함 덜 하고 재미있었다. 여름방학 탐구생활 속의 할머니 집 배경처럼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척들. 사람들 속에서 까르르 웃던 시간들. 놀러 온 동생들과 잠자리도 잡고 방아게비도 잡고 동생들이 하는 농촌체험에 훈수도 두고 나도 기쁘게 참여했던 기억들. 요리 잘하는 이모부가 엄마랑 이모 쉬라고 맛난 음식들 해주고 과자도 쌓아두고 먹고 수박도 옥수수도 참외도 먹고 평상에 앉아서 누워서 별을 보던 때. 모기도 많고 벌레도 많고 덥고 힘들었는데 즐거웠다.


시간은 많고 물건은 부족해서 늘 몸으로 시도해 보길 주저하지 않았던 시절. 놓쳐버린 부의 추월차선을 애써 잊어가며 현생의 삶을 살아가던 시절. 해보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몸으로 부딪혀가며 느릿하지만 천천히 어찌 되었건 해내던 지금 내 나이의 엄마와 아빠.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던 두 부부.

절대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는 단어를 빌려오고 싶은 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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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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