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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Nov 18. 2018

한약방

두 서예가


재 선생은 아버지가 재직했던 대학의 선배 교수로 정년 퇴임을 앞둔 분이었다. 취미 삼아 난을 치고 묵화를 그렸으며 제법 필치를 날리셨다. 선생 댁에 우연히 부모님을 따라가게 된 건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방학 중이었다.


그 댁에 갔을 때 선생이 사랑채에서 글을 쓰고 계셨는데 어린 내 눈에도 멋져 보였다. 집에 돌아와 벼루에 먹을 갈고 그렁저렁 붓글씨 쓰는 흉내를 내고 있던 것을 어머니가 보시고 초재 선생께 붓글씨를 가르쳐달라 한 것이 내가 붓글씨에 입문한 계기라면 계기랄 것이다.


그저 며칠 선생을 뵈었는데 싹수가 보여 그랬는지 혹은 별안간 꼬맹이에게 기초를 가르치는 게 귀찮아져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종내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선생은 읍내 시장 안에 있던 약방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원장이란 분은 비대한 어른이었는데 알고 보니 한약방 위층에 서실을 내고 문하생을 기르는 서예가이기도 했던 거였다. 

그 겨울 내내 나는 한약방 위층 서실에서 영자팔법(永字八法)을 비롯해 안진경 서체를 배우는데 제법 골몰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한 선생에게서 아에게 대학을 안보내도 좋으니 예를 하게 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했으니 그 시절 내가 서예를 진지하게 대했다는 것은 그저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한약방이 있던 어귀 골목 안에는 기정 떡집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붓글씨 하면 골목을 가득 매운 새콤한 기정떡 향기가 겹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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