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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과 맥주

우에노의 덴푸라 가게에서 한 잔

by Jay



20130711_190409.jpg 여행 동안 대부분 주 형의 걸음은 느렸지만 술 한 잔이면 박자도 속도도 단박에 경쾌해져 동행인 나를 기쁘게 했다.


열도의 여름 무더위에 질렸다. 3, 40대 남자 둘이 다니는 여행은 그래서 살가움 대신 날선 짜증과 무기력으로 연신 부딪힌다. 하지만 땅거미가 깔리고 서늘한 바람이 불자 종일 시들어 파삭거리던 평화의 싹이 다시 움튼다.


"형, 헤매는 건 이쯤하고 숙소에서 한 잔?"


말을 건네자마자 내내 무릎에 더위 핑계를 더하며 뒤쳐지던 형이 길을 치고 나간다.


"좋소, 남자 둘이 무슨 신주쿠요, 종일 쇼핑에 끌고 다니기나 하고. 선술집 에어컨 밑이 제격이지."


그래, 이국의 문물이 대수랴. 도쿄 번화가의 흥청임과 네온을 뒤로 하고 일본의 2호선이라 불리는, 야마노테선에 몸을 싣고 호텔이 있는 우에노 역으로 돌아간다. 역 앞 시계탑 온도계는 30도 후반에서 미동 없이 버티고 있다. 맥주, 맥주가 급하다.


" 로컬 분위기 짙은 덴푸라 집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잔!"


형의 단호한 선택이 새삼 든든하다. 이럴 땐 복종마저 달콤하다. 마침 오늘 일정을 나서며 봐둔 가게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미처 가게 이름을 확인할 여가도 없이.


몇 가지 채소를 담백하게 튀겨 반들거리는 목재 테이블 위로 나른다. 양파와 은행이 먼저 나왔고 몇 숨 차이로 생맥주가 놓인다. 형은 그 사이 한 대를 피워 문다. 일본은 처음인 주 형은 담배를 아주 좋아하는데 가는 곳마다 재떨이라며 기꺼이 그 모든 재떨이를 사용했다. 보노라면 때로는 어깨까지 움츠려 모으며 빨아들이는 그 끽연에 막무가내로 동조하고 싶어진다.

담배가 아니면 술잔. 여행의 밤은 그래서 단출하고 흥겹다. 목조로 된 가게는 1층이 주방과 카운터, 2층이 테이블로 채워져 있다. 어딘가 사람들이 오가고 취객들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삐걱거리는 리듬이 낡고 편안하다.


"치익, 후우흡"


마지막 연기를 날숨에 태워 보내고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는다. 넘실, 균형을 잃으며 파도치는 술이 서로의 잔으로 넘나든다. 종일 말라 있던 입술 끝으로 잔의 입구를 살짝 배어 문다. 손목의 각도를 천천히 높이자 출렁, 하고 한 모금이 혀끝으로 치고 들어온다.

첫입은 적시고 다음부터 삼키는 게 내 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거푸 다섯 모금 즈음 달리자 탄산이 목을 할퀴다가 연이어 눈으로 넘어와 찔끔, 안구의 뒷면에서부터 눈망울을 적신다.

반쯤 비워진 잔을 내려놓고 서로 남은 잔의 용량으로 갈증을 살핀다. 오늘도 비슷한 양과 시간에 취하겠다, 대중이 선다. 비로소 안주로 시선을 옮긴다.


"기교라곤 없구만. 양파며 채소를 잘라선 그대로 튀긴. 뭐 그런 순박함도 좋지."


품평은 시큰둥하지만 푹 하고 찌르듯 하나를 집어 입안으로 던져넣는 형의 기백이 교묘하게 침샘을 자극한다. 시나브로 잔을 놓고 젓가락을 든다. 과하게 바삭거리며 식감이 미감보다 먼저 오고 길게 남는 튀김은 아이들 타입이다. 재료의 본색을 살짝 감싸 향과 수분을 방어하며, 기억하고 있는 맛에 고소함만 더하는 정도면 맥주 안주로 훌륭하다. 아무 것도 없이 덖은 은행도 옹골지게 탱글거리며 씹는 재미를 준다.


한 잔은 채소 덴푸라, 다음 잔은 은행 한 알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모금들은 입안에 남은 기름기를 씻겨주듯 혀와 입천장을 마찰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모자람 없이 마실 수 있다. 또 그래야 이어지는 잔들도 처음인냥 상쾌하게 즐길 수 있다.

골목과 대로를 가리지 않고 개처럼 떠돌길 즐기는 나는 무릎 탓을 하며 가다서다 하는 형이 미웠지만 이 한 잔으로 어쨌든 즐거운 여행의 밤, 아무런 마음의 찌꺼기 없이 또 의기투합하게 되는 것이다.


2013. 07. 14


재한 형은 2022년 12월 1일 옛날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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