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

계절이 바뀌면 모른다더니

by 나를 아는 사람

같은 길을 걸어도,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처럼. 아, 여기에 이런 것도 있었어. 왜 이래 지난번에 왔던 곳이잖아. 맞다. 그래. 하고 생각해 보면 왔던 곳이다. 대화를 하면서 무심코 지나쳐 버린 그럴 때가 있다. 자세히 보지 않고 관심 갖지 않으면 그렇다.


여기에 나무가 있었어, 이런 꽃도, 저 건물은 언제 지었지? 진작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데 처음 본 것처럼 말한다. 일부러 그러는가 싶을 정도로 진짜 모른다. 두 눈을 번쩍 뜨고 잘 보려고 해 본다. 무엇을? 똑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관심 가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외적인 것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 가는 길이 아니라, 매일 보고 걷고 지나가는 길인데도 낯설 때가 있다. 어, 저게 저기 있었나, 갈림길이 왜 저기 있지? 여긴 원래 건널목이 없었나?. 음. 발걸음의 속도를 줄여가며 자세히 본다. 저기 저 건물 색이 노란색이었어? 길가에 무심히 서 있는 전봇대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어?, 그럴 때가 있다. 생각 없이 앞만 보고 걸을 때, 놓쳐서 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



논두렁길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들판은 곱게 염색한 옷감처럼 물들어간다. 벼 수확을 하고 난 빈 논에는 새떼가 잔치 중이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넓은 들판 가운데 한 곳의 논에만 몰려 있다. 농부가 흘린 것인지, 뿌린 것인지, 놔둔 것인지. 수확의 기쁨을 인간과 새들이 공유하듯 나눈다. 새들은 논바닥에서 먹이를 구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무르익은 잔치 분위기를 깨듯 갑자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부터 무슨 소린가 봤더니, 한 남자가 새떼들을 향해 달려들듯 내달리며 고함을 지른다. 새들은 놀라서 한 방향으로 떼 지어 도망간다. 남자는 허겁지겁 겁을 먹고 달아나는 새떼의 모습을 잠깐 즐기는 듯하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다행히 한 번으로 그치고 가던 길을 향해 간다. 새들은 잠시 후 다시 그 논으로 모여든다. 난 두 개의 논을 사이에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찰나. 논 바닥에서부터 하늘 위로 비상하는 새떼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찍지 못한다. 눈에 담고 가던 길을 간다. 자주 다니는 이 길이 새떼들로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계절이 지나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다음 해 가을이 오기 전에는. 기다려야 한다.


둑길

시냇물을 막아 둔 둑 아래 모여든 물 오리들은 종종걸음으로 올렸다 내렸다 목 운동 중이다. 물살을 타고 여행 떠나는 작은 물고기를 잡는 중이다. 물 오리는 한두 마리 있을 때도 있고, 대 여섯 마리가 있을 때도 있다. 오늘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열 마리 이상이다. 물 오리들은 시력도 좋다. 흐르는 물속에서 물고기를 잘도 찾아내는 걸 보니.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밋밋한 둑 길을 꽃길만 걸으라며 꽃을 심은 손길. 달 전 여러 가지 색의 코스모스가 섞여서 예쁜 모습을 띠고 알록달록 백일홍이 눈길을 끌더니. 고개를 떨구고 아래로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는다. 화려 하게 태어나서 쓸쓸하게 지고 아쉬움만 남긴다. 한동안 다시 밋밋한 이 길에 다시 잎이 앙증맞고 키가 작아 귀여운 코스모스가 나온다. 키 작은 백일홍도 풀잎에 섞여서 고개를 내민다. 허리를 깊숙이 숙여 들여다본다. 죽었다 살아났는지, 누군가 뿌린 새싹으로 자라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귀엽고 예뻐서 자꾸 이 길을 걷고 싶어 진다.


억새가 눈에 들어 온다. 마른 억새를 잊으라는 듯 아침에 만난 억새는 붉다. 젖었다. 젖어서 붉게 보이는 것인지, 붉어서 젖어 보이는 것인지 아무튼 붉다. 억새의 이름처럼 억세 보인다. 기둥은 붉고 나풀거리는 누런 꽃잎은 차분하다. 폴폴 가볍게 날릴 것만 같은데 아직은 바람을 만나지 못했나 보다. 땅의 기운을 받고 굳게 서 있는 억새가 새삼 멋져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 더 그렇다.


억새풀을 뒤로하고 물안개를 만난다. 몇 해전 이맘때쯤. 넓고 긴 전북 진안군 용담호에서 봤던 몽환적인 물안개. 스치듯 창밖으로 보곤 첫눈에 반했는데. 머릿속에만 남아 서툰 솜씨로 그려 보았던 물안개. 거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은 냇가에서 물안개를 본다. 얼굴에 남아 있는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하다. 마을과 마을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가 뒷바탕이 되고 황화코스모스와 잡풀들이 어우러져 운치를 끌어올린다. 물 위에 간신히 오르면 금세 사라지는 물안개.


하루가 다르게 자연은 변화를 시도한다. 바람이 오른쪽으로 불어오면 오른쪽으로 자라고, 왼쪽으로 밀어붙이면 왼쪽으로 자란다. 그냥 받아들인다. 왜 한쪽 방향으로만 자라냐고 시비 거는 이도 없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은 물가에서 잘 자라고 물을 싫어하는 식물은 마른 곳에서 잘 자란다. 바람 따라 씨앗이 날리면 날리는 대로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 본다. 현재의 자리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며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아름답게 변해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이 모든 걸 알기란 어렵다. 계절이 바뀌면 알던 것도 모르고 모르던 것은 더 모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