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쏟아지던 비가 개인 날엔 자연은 더 맑고 깨끗한 풍광으로 돌아온다. 오후가 되어 동네 산책을 나선다.
남편은 친정에 가면 매번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코스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어차피 길은 만나게 된다. 돌담을 한 바퀴 돌아서서 보니, 저 멀리 바다 건너 안개에 싸인 먼 산이 남해의 설흘산이 아닐까 싶다.날씨가 맑고 좋은 날엔 더 선명하게 보인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걷다 보니 산길 양쪽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 사이로 다시 바다가 열린다. 멀리 바다 왼편으로 안개로 인해 반으로 잘린듯한 고정된 조선소의 큰 배가 바다로 흘러들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가 움직이는지, 배가 움직이는지 자꾸만 배의 모양이 달라 보인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비탈진 산길을 내려갈수록 바다는 가까워지고 들꽃은 싱그럽게 피어 있다. 진한 초록의 풀들이 물기 어린 모습으로 반긴다. 풀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한 번 건드려 본다. 이 물방울은 비가 내릴 때 위에서 부터 잎과 잎 사이를 통통 튕겨 내려와 잎 끝에 모였으리라.
물기 머금은 잎 사이로 살며시 손을 내밀면 방울방울 물방울이 모인다. 물 안에 손을 넣은 건지, 손안에 물이 고인 건지 결국 젖은 손. 한 움큼 모여든 물방울로 무얼 하지! 손바닥 분수대라도 만들어 다시 사방에 널려 있는 풀잎에 흩뿌려야 할까! 다시 풀잎 끝으로 물방울이 습관처럼 모여들겠지. 물방울은 풀잎의 종류에 따라 대부분 가장자리에 모이지만, 난초나 솔잎처럼 가늘고 뾰족한 잎은 끝으로 모여위태로운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도토리나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도토리나무라 생각하고 보면 또 다른 이름.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왜 이름이 다르지? 흔히 도토리나무라 생각한 나무를 사전으로 찾아보니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 열매의 총칭'이라 나온다. 참나무 여섯 형제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볼 때마다 헷갈리고 잘 모르겠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이름이라곤 소나무, 오동나무. 들꽃은 하얀 찔레꽃과 아카시아. 나머지는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들판에 핀 꽃은 전부 다 들꽃, 나무는 그냥 나무라 생각했다. 각각의 꽃과 나무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무와 꽃들을 자세히 바라 볼 생각을 못했다.
하얀 찔레꽃 가까이 가서 향기를 맡아본다. 향긋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물기가 서린다. 손이 저절로 코 끝으로 향한다. 짙은 녹음과 좁은 산길 언저리에 피어서인지 더 진한 찔레의 향이 나는 듯하다. 좀 더 아래로 내려가니 어린날 자주 보고 자란 꽃이 있다. 바닷가 기까이 갈수록 색색의 꽃들이 많아진다.
예전엔 멀리서 스치듯 보던 꽃을 가까이 앉아서 자세히 봤더니 꽃잎이 다섯 개인데 바람개비처럼 생겼다. 참 신기하다. 휴대폰 렌즈를 이용해 이름을 찾아보니 '마삭줄, 마삭나무'라 나온다. 꽃은 익숙한데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바로 옆에는 노란 꽃이 군락을 이룬다. 평소 산책길에서 많이 보던 꽃인데, 꽃 씨도 받은 적 있는데 이름을 모르겠다. 다시 휴대폰 렌즈로 확인 한 이름은 바로 '금계국'이다. 가끔 휴대폰 렌즈가 엉뚱한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 그냥 금계국이라고 믿기로 했다.
클레로 덴드론이라는 화려한 꽃도 있다. 처음 보는 야생화로 흰색 꽃잎 속에서 다시 빨간 꽃이 나오는 꽃. 렌즈로 찾아낸 이름이다. 꽃말은 행운, 우아한 여성이다. 난 몇 해 전부터 산이나 들에 가서 모르는 꽃이나 나무가 있으면 렌즈로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들꽃에 이름을 붙여 불러 보니 꽃이 새롭게 와닿고 좀 더 친근해진 느낌이다. 바닷가에서 다시 마을로 올라가니 주택가 주변에 철사로 동여 매어 인위적으로 만든 자그마한 소나무 분재가 즐비하다. 나무가 자유롭게 자라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매달려 살고 있다.
어둑해진 시골길 옆 텃밭에는 땅이 헐거워서 파인 것인지, 일부러 파 놓은 것인지 아주 깊게 파인 흙 두둑과 고랑이 있다. 큰 비가 쏟아진다면 흙이 힘없이 허물어질 듯 위태롭다. 다시 금계국이 보인다. 질세라 붓꽃도 낀다.
물방울은 풀잎에 매달리고, 소나무 분재는 사람의 손에 매달려 살고. 사람은 인연에 매달려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