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1년 반 가량 전셋집에 살다 좋은 기회를 맞아서 고양시의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사업 3년 차에 오랫동안 염원했던 ‘내 집’을 누구 손 하나 빌리지 않고 둘의 힘만으로 장만하다니. 아직 새 집 냄새가 가시지 않은 아파트를 둘러보며 감개무량했다. 늘 고객들의 집만 디자인하다 내 집이 생기자 부푼 마음으로 아이 방, 거실, 주방까지 전체 시공을 감행했다. 우리만의 스타일대로 꾸민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 하루하루 행복했다.
꿈만 같은 내 집에서 살게 된 지 반년즈음 되어가던 어느 봄날. 남편이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교외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했다. 근처에 전원주택 단지가 있다며 나들이 삼아 구경을 가자고 했다. 주변 지인 중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는 이도 거의 없었고, 하나의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단지를 가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주택 프로젝트도 두어 번 정도 부분 시공만 해봤기에 레퍼런스 삼을 겸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햇살 가득한 일요일 오후,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나섰다. 남편 말대로 정말 10분 거리에 전원주택단지가 있었다. 한적함과 여유로운 기운이 단지 입구까지 마중 나와 우리를 반겼다. 단지 내로 들어서서, 봄을 맞아 잔디 깔린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집들을 서서히 지나쳤다. 차창 밖의 풍경은 불과 10분 전까지 내가 있었던 세상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잔디 위를 뛰노는 강아지와 어린아이들, 사람의 얼굴처럼 각자 다른 매력을 지닌 주택들이 모여 이루는 아름다움… 나는 말없이 넋을 잃었다. 짧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장면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지난 주말 보았던 전원주택들의 장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과 자연에 관한 기억들까지 모두 달려 나와서 나를 껴안았다. 우리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풀의 감촉을 피부로 느끼고 하늘의 색깔을 매일 눈으로 그리며 살 수 있다면. 층간 소음 없이 집에서 맘껏 뛰어놀고 마당에서 좋아하는 모래 놀이도 원 없이 할 수 있다면. 휘몰아치는 생각의 폭풍 속에서 보름이 흘렀다. 회사에 있을 오후에 남편이 갑자기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놀란 채로 전화를 받은 내게 남편이 가장 처음 한 한마디는 이랬다.
“우리 집 지어서 이사 갈까?”
나도 한마디로만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그날의 드라이브 이후 전원주택 이야기라곤 한번도 꺼내본 적 없는 상태였다. 보름간 서로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함께 생각하고 있었구나. 일심동체가 맞는구나 싶었다. 그다음 날부터 우리는 집터를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집터를 고르기 위해 설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단순히 집의 모양뿐 아니라, 진정한 전원생활이 가능한 마을에 자리할 것
어린이집과 학교가 너무 멀지 않고 출퇴근이 용이할 것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자산으로 부지 매입과 건축, 인테리어까지 가능한 금액일 것
드라이브를 갔던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그곳 토지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가장 첫 번째로 본 땅은 100평 미만의 아담한 토지였는데, 컨디션이 괜찮아서 계약하려 했으나 주인과 이래저래 조건이 맞지 않아 마지막에 불발되었다. 그다음 보러 간 곳은 땅 바로 옆에 묘지가 있는데, 묘지를 이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실망을 감추고 세 번째로 보러 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정사각형의 양지바른 대지였다. 아래에 아직 빈 땅들이 있어 시야가 확 트여 있었고 넓은 평수 대비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이 땅의 경우 토지의 본래 주인이 돌아가시며 자녀들에게 상속된 토지였는데, 자녀의 자녀까지 포함해 주인이 총 7명이나 되었다. 수십 수백 개의 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해 봤어도 땅을 매입하는 것은 처음일뿐더러 주인이 7명이나 되는 땅은 또 처음 보았다. 시골은 매매 필지 단위가 도시보다 훨씬 큰 데다 주인들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땅만 팔 리도 만무하기에 고민이 깊었다.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땅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우리 조건에 맞는 좋은 땅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남편과 길게 상의한 끝에 우리는 그 땅을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토지를 계약하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토지 매매와 관련한 각종 서적과 자료를 최대한 모아 집으로 가져왔다. 직접 집을 짓기로 한 게 오래 계획해 온 일은 아니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했지만, 그동안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 함께 공부할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주 앉아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자료와 서적들을 들춰가며 공부했다.
그렇게 7월의 끝자락에, 우리는 땅 주인 7명의 도장을 하나하나 모두 받아 정식으로 토지 매매 계약을 마치게 되었다. 집을 짓기로 결심한 지 꼭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여태까지도 쉽진 않았으나 계약도 깔끔하게 완료했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서에 우리 도장을 쾅쾅 찍은 뒤 후련함을 느끼며 땅으로 돌아와 요리조리 뜯어봤다.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는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를 다독였다. 지금껏 해온 것처럼 어떻게든 잘 풀어 나가면 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