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후회를 했습니다.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한 조각 추억
말리지 좀 가야 하니깐,
나 없이도 잘 살아가길 바래
세상아 나 이제야 간다.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 ED. 출사표 중
족제비도 행복한 세상에 산다네요. 우리도 그래야죠. 사실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라는 만화를 본 적 없습니다만, 엔딩곡 '출사표'는 퇴사하는 제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침대는 푹신하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치 않던 퇴사 전날 저녁, 이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들었네요. 혹시, 사직서를 제출한 분들은 꼭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퇴사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걱정과 후회가 밀려오면 요즘에도 종종 듣습니다.
퇴사 후
다음 날
마지막 퇴근길.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알람을 새벽 다섯 시로 맞췄어요. 그 이른 새벽에 일어나니 마치 수명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새벽형 인간이 되긴 글렀네요. 아무튼, 겨우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새벽 기도회는 차분하고 고요했어요. 꿈인지 생신지 모를 몽롱함에 예배당 맨 뒤에서 꾸벅꾸벅 졸았네요. 아. 그래도 기도는 했어요. 지금의 결심과 각오가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이젠 한 집안의 가장이신 아내님을 회사로 배웅해 드리고, 강아지와 산책을 나갔습니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았지만 상쾌했어요. 그리고 헬스장에서 가슴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도 운동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요리를 해봤어요. 소고기 뭇국을 만들어봤는데, 칼로 무를 썰다가 사무라이처럼 할복할 뻔했습니다. 그날 후로 무가 들어간 요리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요리는 꽤나 위험한 행위입니다. 조심하세요.
위험천만한 곡예를 끝내고 점심을 차려 먹었어요. 그리고 커피를 내려 동네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사람이 많더군요. 몇몇은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두터운 책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곁눈질하니, 대부분 자격증 공부를 하더군요. 열심히 살자고 한번 더 다짐했습니다.
예전에는 독서가 취미였는데요. 이젠 책을 보는 게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글쓰기, 작가 관련 책을 몇 권 빌려 집으로 돌아와 대청소를 했습니다. 그 옛날 엄마가 왜 그리 가구를 이리저리 옮겼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저도 책상, 서랍장, 선반을 여기저기로 옮겨봤습니다. 기분이 새롭더군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강아지와 두 번째 산책을 다녀오니 여섯 시더군요. 백수 첫날. 저도 그렇게 출근하고 퇴근했습니다.
퇴사 후
하루 루틴
아. '37살 아저씨 퇴사성공기'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제게 퇴사는 새로운 시작이자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굉장히 게으릅니다. 때문에 가장 경계한 것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나태해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래처럼, 루틴 한 하루를 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06:30 : 기상
06:30 ~ 07:00 : 아내님 출근길 돕기
07:30 ~ 08:00 : 간단한 아침식사 및 청소
08:00 ~ 10:00 : 근력 및 유산소 운동
10:00 ~ 10:30 : 강아지 산책
10:30 ~ 12:00 : 블로그 or 별스타그램 게시물 작성
12:00 ~ 13:00 : 점심식사
13:00 ~ 18:00 : 공부(글쓰기, 자격증 등) 및 글쓰기(웹소설, 소설, 에세이 등)
18:00 ~ 18:30 : 강아지 산책
18:30 ~ 19:00 : 저녁준비 및 청소
19:00 ~ 20:00 : 저녁식사
20:00 ~ 23:00 : 집안일, 독서 및 취미활동(게임 등)
23:00 : 취침
오. 이렇게 쓰니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껴지네요. 처음에는 '일일업무일지'도 작성할까 했지만, 관뒀습니다. 퇴사를 후회하지 않아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루틴 하게 하루를 보내니, 걱정할 시간은 줄어들어 의미 있었어요. 그동안 몇 가지 성과도 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차차 공유할게요.
마음에서
회사를
놓아주기
2014년 1월에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2023년 작년까지 10년을 꽉 채웠네요. 처음엔 일을 그만둔 게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랜 휴가를 가는 느낌이랄까요? 복귀일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젠간 돌아가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간간이 들려오는 회사 소식에 기쁘기도, 답답하고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몸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회사로 출근했나 봐요. 그럴 만도 합니다. 3,650일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니깐요. 퇴사 후 초반에는 회사와 정서적으로 떨어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차츰 나아지긴 했지만요.
몸 담았던 회사를 사랑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던 일이나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래도 놓아줘야 합니다. 이젠 그곳과 저는 아무 관계없는 곳이니깐요.
10년의
직장생활
남은 건?
'카페에서 능숙하게 딸기 스무디를 만드는 사람'
'명당을 찾아 주차하고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찾아 택배를 배송하는 사람'
'신속하고 안전하게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
'편의점 카운터에서 계산하며 물건도 정리하는 사람'
퇴사했는데 갑자기 변수가 생긴다? 생계를 위해 뭐라도 해야죠. 회사를 다닐 땐 막연히 "쉽겠지?" 하던 일들. 막상 하려니 도무지 엄두가 안 났습니다. 마주하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배워야 했어요.
힘들게 회사에서 외우고 익힌 매뉴얼과 지침, 눈 감아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내통신망, 뚝딱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서는 회사 밖에서 아무 쓸모없었습니다. 힘들게 레벨업 했는데 마치 1 레벨로 돌아간 듯했어요. 허무했습니다. 만약 어디론가 이직한다면 10년의 세월은 이력서에 한 줄로 채워질 뿐이었습니다.
아. 그래도 남은 게 있네요. 사람은 어떤 행동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저런 사람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일을 잘하게끔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주절주절 썼습니다만, 한 마디로 눈치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쌓은 나만의 데이터. 이거 하난 확실한 자산이네요.
퇴사하고
밀려오는
후회
네 맞습니다. 퇴사하니 후회가 밀려왔어요. '아.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런 건 아닙니다. 다니던 회사에 미련은 없어요. 하지만, 몇 가지 후회는 있습니다.
하나. 왜, 더 빨리 그만두지 않았을까?
작가라는 꿈에 도전하는 과정.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조급 함입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기에 빨리 성과를 내고 싶거든요. 쓰고 보니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어디 그게 쉽겠습니까?
과거부터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일은 꽤나 명확했지만, 매년 미루고 미뤘습니다. 인생에서 의미 없는 시간은 없겠지만요. 끝내 그만두니 '이럴 거면 더 빨리 퇴사할걸'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좀 더 빨리 결단하고 꿈을 위해 달렸더라면, 지금보단 여유로웠을 것 같아요.
둘. 그동안 왜 그렇게 일에 빠져 살았을까?
제가 장 트러블이 심한 편이에요. 특히 출근길에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유사시 편한 대처를 위해 항상 20분 정도 여유롭게 출근했습니다. 배도 아픈데 지각 걱정까지 하면, 하루 시작이 엉망이잖아요.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모범적인 근무태도를 갖췄었다고 자부합니다.
자. 그럼 가슴에 손을 얹겠습니다. 네.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근데 퇴사하니깐요. 내가 무엇을 그토록 열심히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일 열심히 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만약 '네'라고 대답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열심히 하시나요? 저는 다음과 같았어요.
회사에서 짜인 서식에 무언가를 쓰거나
정해진 기한에 맞춰 기안이나 보고서를 쓰거나
상사나 부하직원의 눈치를 보거나
일이 많아서 야근하지만, 효율은 없거나
실적에 대한 부담감으로 근심, 걱정을 하거나
생각이나 뜻이 맞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협력업체와 갈등이 있어 다투거나 등등
열심히 했습니다. 자아를 잃고 조직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칭찬받기 위해서요.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제 정신과 마음을 회사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결국 남는 장사는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셋. 그동안 왜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누가 직장인을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로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인류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표현 아닐까 싶습니다. 찾아서 상을 줘야 해요.
연봉은 높지 않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평생직장. 1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니, 언제나 퇴근을 기다리며 출근했고, 금요일이 며칠 남았는지 체크했습니다. 주말에는 스트레스 푼다는 이유로 남는 거 하나 없는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아. 수명을 단축시킨 잦은 술자리도 기억나네요.
Nine to Six. 회사를 다닐 땐 그토록 기다린 퇴근시간. 하지만 그 시간 이후에 도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남는 것도 별로 없었고요. 10년의 직장생활을 혹독하고 냉정하게 한 줄로 요약하면,
'퇴근과 주말만 기다리던 삶.'
정말 보잘것없는 인생이네요. 그래도 항변하자면, 운동과 독서도 꾸준히 했고 글도 썼습니다. 하지만, 원대한 꿈에 비해 그 노력은 개미 눈곱 정도도 안될 것 같아요. 퇴사하고 가장 후회된 건, 왜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았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근본적으로 내 일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걸'
'작가가 꿈이니 글을 더 많이 쓸걸'
'새로운 직업을 위해 대학원에 다닐걸'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 볼걸'
'영어 공부라도 좀 해 볼걸'
'여행이라도 많이 다녀볼걸'
더 있는데 그만하겠습니다. 쳇바퀴 돌리던 다람쥐는 크게 표효하며 철창 밖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것 빼곤, 잘하는 게 없었습니다. 오해하진 말아 주세요. 제 인생이 그랬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취업이나 회사 생활을 인생의 최종 목적으로 보지 않고, 계속 노력하며 자신의 인생을 가꿔가는 분들이 많으니깐요.
결국 내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서 무얼 하던,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 이걸 세월이란 비용을 지불하고 뼈저리게 배웠으니 말입니다. 37살 아저씨가 돼버렸지만요.
"우와. 그래서 지금은 하루하루 소중히 살고 계시죠?"
라고 물으신다면, 아닙니다. 한 가지 배운 게 또 있는데요. 인간은 정말 나약합니다. 인생을 걸고 퇴사를 했지만, 아직도 의미 없는 영상이나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기는 물건을 보며, 도파민을 충전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글을 쓰겠다며 책상에 앉더라도 손에 쥐어진 핸드폰 세상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많고요.
다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듭니다. 이 악물고 책을 보고 공부하며 글을 써요. 하기 싫고 힘든 것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얻으려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그리고 항상 10년 뒤를 생각해요. 그때도 무언가 후회는 있겠죠. 하지만, 지금과 똑같은 후회를 할 순 없습니다.
결국, 퇴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가는지가 중요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