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닷새째다. 푸틴의 계획이 재빨리 수도 키이브와 주요 도시를 점령한 다음 쿠데타를 사주하든 젤렌스키 대통령을 암살하든 속전속결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면, 그 계획은 여러모로 삐그덕거리고 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굴하지 않고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용기는 대단하다 못해 경이롭다. 반대로 원하는 걸 얻지 못한 푸틴과 크렘린의 고위 관료들은 명분도 잃었고 계획이 틀어진 탓에 명분을 만회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벌지 못했으며, 서방의 경제 제재 탓에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궁지로 몰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황과 함께 러시아 안에서도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모두 희망적인 소식이지만, 마냥 반색할 수만은 없다. 푸틴의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지만, 여전히 러시아군의 전력은 우크라이나를 압도하고도 남으며, 궁지에 몰릴수록 푸틴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겪을 상상도 못할 고통이 별로 고려되지 않는 듯한 말과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다시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무기력감이 밀려온다.
전 세계가 러시아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한 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다. 뉴욕에서도 연대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임인년 첫 날인 설날 건물에 호랑이 사진을 투사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우크라이나 국기 색을 입었다. 집 앞 워싱턴스퀘어 공원은 밤에는 파티피플의 메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가 가장 먼저 열리곤 하는 시위 1번지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 워싱턴스퀘어 공원을 비롯한 뉴욕 각지에서 우크라이나와 연대의 뜻을 표하는 반전 시위가 열렸다.
다른 일 하느라 집회에는 가지 못했지만, 아주 작은 거라도 도움이 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아내 학과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가운데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출신 학생이 전쟁을 규탄하는 연서를 돌렸다. 거기 나온 믿을 수 있는 단체에 기부하고, 온라인 청원에도 참여했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있는 70년 전통의 우크라이나 식당 베셀카(Veselka)에 가서 우크라이나 전통 음식인 비트를 푹 끓여낸 수프와 피에로기라는 만두를 먹었다. 평소보다 손님이 많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아도 별 게 없다는 사실에 힘이 빠지다가도 또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뭐가 됐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계속 하자.
전쟁에 관한 분석이 연일 모든 언론에서 쏟아진다. 소셜미디어에도 온통 전쟁 이야기, 경제 제재 이야기, 푸틴에 대한 저주로 가득하다. 우크라이나 기자들이 세운 독립언론 키이브 인디펜던트(Kyiv Independent)는 전쟁 전에 팔로워가 2만 명이었는데, 며칠 새 1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미국이 러시아 은행들을 금융기관 간 통신 협약인 스위프트(SWIFT)에서 제재한다는 글을 비롯해 나도 넘쳐나는 뉴스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대부분 뉴스와 칼럼은 강대국의 관점에서 본 정세나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물론 필요한 내용이지만,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지금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행위인지가 좀처럼 와닿지 않아서 한편으로 공허했다.
그러다 페이스북에서 같이 경영대학원에 다녔던 러시아 친구 D가 남긴 짧은 글을 읽었다. 2015년에 졸업과 동시에 딱히 연락을 주고받은 기억은 없다. 그저 같이 학교 다닌 인연으로 ‘페친’이 됐고, 그 사이 딱히 절교할 만한 일은 없던 덕분에 지금껏 건조하게 페친 목록을 채우고 있는 많은 비즈니스스쿨 친구 중 한 명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키이브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키이브에서 보냈다. 우리 가족은 나중에 모스크바로 이사를 갔지만, 지금도 키이브에는 친지들이 꽤 있다. 어렸을 적 친구들 중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나를 더는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 우크라이나는 남의 나라가 아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지금 당혹스러워하는데, 나는 그보다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중략)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우크라이나를 도울 것이다.
미국에선 웬만큼 친해도 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다. 몇 살인지, 몇 학번인지, 그래서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몰라도 친구를 사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초면에는 물론이고 꽤 친해지고 나서도 맥락 없이 나이를 물어보는 건 대체로 큰 실례다. D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러시아에서 학부를 나오고 일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왔으니, 80년대 생일 거다. 그러니까 D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브(Kyiv)가 아닌 소비에트 연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키예프(Kiev)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한반도를 갈라놓은 분단의 역사와 결이 다르긴 하지만, 개인의 의사는 전혀 묻지 않고 그어진 국경선이 가족을 갈라놓고 친구를 등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D의 세상 속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진짜 한 가족과도 같을 텐데, 큰집이 작은집을 향해 갑자기 총기를 난사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큰 충격이었을 테고, 화를 참을 수 없었을 거다.
전쟁의 상처는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평생을 간다. 우리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라 국민 아닌가.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까지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우리집에 와서 주무셨다. 주무실 땐 내 방에서 주무셨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서 큰 나는 다 커서도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자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딱 한 번, 할머니가 아마도 끔찍한 악몽을 꾼 날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먼저 주무셨고, 나는 라디오를 작게 틀어놓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나 그랬다. 갑자기 할머니가 흐느끼며 잠꼬대를 하셨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직 열 살도 안 된 애란 말이에요. 거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제발요..."
흐느낌이 울부짖음으로 변하면서 정확히 뭐라고 하시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대략 저런 내용이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쫓아와서 집안 곳곳을 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빌다가 뭔가를 감싸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잔뜩 웅크리셨다.
깜짝 놀라 다급히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왜 그래, 괜찮아?"
한동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던 할머니는 다행히 꿈에서 깨는 동시에 맥이 탁 풀리신 듯 다시 잠이 드셨다. 다음날 할머니한테 조심스레 무슨 꿈을 꾸셨는지 물어봤지만, 기억하지 못하셨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서 다행이다 싶을 만큼 꿈속에서 할머니가 느끼던 공포는 내게도 생생히 전해졌다. 황해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한국 전쟁 때 전란을 피해 부산까지 가셨고, 거기서 막내인 아빠를 낳으셨다. 할머니가 말한 열 살도 안 되는 아이는 나는 물론 아빠도 본 적이 없는 내 고모나 큰아빠였을 수도 있다.
수많은 스포츠, 바둑, 장기 같은 대국, 각종 싸움을 전쟁에 비유하지만, 전쟁은 사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쟁일 뿐이다.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 전쟁이든, 어떤 명분을 앞세운 전쟁이든 거기서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누군가의 부모, 자식이고, 형제이고, 친구이며 이웃이기에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을 향해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걸음, 제스처는 그 자체로 비난받아야 한다.
세계인들은 한 목소리로 푸틴의 망상과 야욕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을 우리 모두의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 강대국의 논리, 외교 정책의 실패, 경제 제재와 외환 보유고 얘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전에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부터 한 번씩 상기하고 말을 나누면 좋겠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보자"는 말도 사실 나는 좀 듣기 거북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반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작다면 관심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렇다. BTS가 UN에서 평화를 주제로 연설했다고 요란한 'K 수식어'를 붙이며 '국뽕'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보편의 가치는 굳이 특별한 사유를 붙이지 않더라도 보편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 정도는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다면, 그렇게 되고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