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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r 05. 2022

난민의 계급

아침에 눈을 뜨면 밤 사이 쌓인 카톡, 이메일보다 먼저 우크라이나 전황부터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됐다. 러시아군은 지금 어디 있는지, 전문가들이 우려한 대로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지는 않았는지, 젤렌스키 대통령은 계속 수도 키이우에서 무사한지 초조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고는 고작 몇 시간짜리 안도를 얻는다. 

얼마 안 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뿐 대체로 상황은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는 데 다시 생각이 미친다. 평화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러시아군은 병원이나 학교 같은 곳을 일부러 골라 폭격한다. 명백한 전쟁 범죄다. 우크라이나를 떠나 주변국으로 쏟아지는 우크라이나 난민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푸틴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면 또 일이 손에 안 잡혀서 한동안 뉴스를 뒤져보고는 금새 시들고 말 몇 시간 짜리 안도를 얻는 일이 반복된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이라도 결국은 우리 모두 영향을 받을 테지만, 당장은 일상의 사소한 문제가 내 주의를 잡아먹는다. 오랜만에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하나 새로 올렸는데, 애플 팟캐스트 플랫폼에만 에피소드가 올라가지 않는다. 팟빵은 별도로 자체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직접 올려야 하고, 나머지 플랫폼은 호스팅 서비스를 통해 에피소드를 올려두면 rss 피드를 긁어서 자동으로 에피소드가 올라가는 식이다. 그런데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던 애플 팟캐스트에서만 왜인지 새 에피소드가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호스팅 서비스에, 애플 팟캐스트 측에 문의하고 (당연히) 바로 올 리 없는 답을 기다리면서 이것저것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긴 기계가 고장 났을 때 껐다 켜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뭐를 해봤다고 할 수도 없다. 플랫폼 경제 이야기를 하며 빅테크 기업을 잔뜩 비판했는데, 그래서 애플이 심통을 부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겐 확실히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아무튼 애플 팟캐스트로 아메리카노 듣는 청취자가 많아서 거기에 못 올리면 홍보 효과도 분명 작을 텐데... 초조함에 애만 쓰고 끙끙거리다가 이내 무기력해지는 사이클의 중간중간에 우크라이나 전황 보고 한숨 쉬는 일을 두어 번 반복하니 오전이 통으로 날아가버렸다.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씻고 챙겨서 웨스트빌리지에 있는 카페로 왔다.

"손님 이름이... Leo 맞죠?"

"저요? 아니,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몇 번 왔잖아요. 마스크 때문에 긴가민가 했는데 맞았네요."

최근 두세 번 정도 간 카페인데, 음료랑 샌드위치 주문 외에는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손님의 인상착의를 마스크를 벗기도 전에 알아보다니 엄청난 눈썰미다. 눈썰미가 없기로 유명한 나는 눈썰미 좋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백신 카드 보여드려야 하죠? 잠시만요, 사진이 여기..."

"아, 전에 보여주셨으니 괜찮아요."

사실 다음 주부터 뉴욕시에서도 백신 접종 이력 없이도 마스크 안 쓰고 식당, 카페에 들어가도 된다. 원래 잘 안 지켜지긴 했지만 방역 지침이 본격적으로 느슨해지자,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풀린 것 같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선 마스크 안 쓰고 타는 사람을 점점 더 자주 마주친다. 몇 주 전이었어도 눈을 부라리며 내리라고 했을 텐데, 이젠 그러려니 한다. 물론 마스크를 단단히 올려 쓰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면서 눈치를 주긴 하지만, 원래 미국 사람들은 (한국 기준에선) 눈치가 없다. 마스크를 드디어 벗을 수 있게 됐지만, 코로나19를 극복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미국에서만 코로나19로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니, 희생이 너무 컸다. 살아남은 사람들만 이제 끝이 보인다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만 같아서 한편으로 마음이 착잡하다.

Leo는 카페나 식당에서 필요할 때만 쓰는 내 별칭이다. 한국 이름 '인근'을 로마자 표기 규정에 따라 'Inkeun'으로 써놓았더니,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 누구도, 절대 저 글자를 '인근'으로 읽지 못한다. '인큔', '인키어...ㄴ?', '인쿤', '인ㅋ... 쏭!' 등 다양하다. 음료가 준비되면 진동벨로 알려주는 시스템은 미국에서 본 적이 없다. 이름이 불려야 커피도 마시고, 샐러드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존경하는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의 애칭 레오(Leo)를 따라 쓰고 있다. 미국 영어 발음으로는 '레오'보다 '리오'에 가까운 것 같길래 그렇게 부르긴 하는데, 내 이름인데도 발음에 자신이 없어서 늘 얼버무리곤 한다.

다른 나라 말은 발음도, 표기도 늘 어렵다. 우크라이나 수도도 키예프가 아니라 키이우가 맞다고 해서 그렇게 며칠을 썼는데,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크이우로 써달라고 했다고 해서 찾아봤더니 우크라이나 사람이 하는 발음은 키와 크의 중간쯤이더라. 어느 기사를 보니 대사관 측에서 '키이우'도 맞다고 얘기해줬다고 한다.


벌써 열흘 가까이 이어지는 전쟁을 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중에 무척 씁쓸한 뉴스를 접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가 카톡에서 이런 일이 있다고 먼저 알려줘서 찾아본 뉴스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이고, 사람들이 다 백인이니까 미국이랑 유럽 언론이 더 충격받고 24시간 내내 보도하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그게 무슨 소리야. 러시아가 워낙 끔찍하게 막무가내로 나오니까 그런 거겠지."

"아냐, '중동이나 아프리카도 아니고, 문명화된 유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말하는 기자도 있더라고."


설마 정말 그랬을까 하고 찾아봤더니, 트레버 노아가 데일리쇼에서 이미 이 문제를 다뤘다. 미국과 서유럽 방송에 나오는 기자, 전문가들은 마치 자기 가족, 형제, 이웃이 고통받고 있어서 괴로워하는 톤으로 전쟁 소식을 전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보도는 물론 언론이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긴 한데,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드러내는 기자도 있었다. (위 링크 10분 33초부터 나온다.)

지금 이게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가 아녜요. 물론 거기라고 늘 그렇다는 법은 없죠. 말을 신중히 가려해야겠지만,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상대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더 문명화된 곳이랄까요? 우리 이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데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충격인 거죠.


아주 잠깐이지만, 할 말을 잃고 벙 쪘다. 

신중히 가려서 한 말이 저거라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 그래서 몇 년째 내전이 계속되는 시리아에선 폭탄 테러로 몇십 명이 죽고, 백신이 없어서, 먹을 게 없어서 어린이가 죽어가도 뉴스 보도 가치가 없던 걸까? 인도에선, 미얀마에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청소에 가까운 끔찍한 테러가 끊이지 않는데, 거기는 원래 그런 나라라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건가? 도대체 전쟁이 날 만한 곳이 세상에 어딨고, 처음부터 평화로울 운명을 타고 난 낙원이 지구 상에 어디 있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 전쟁을 일으킨 원죄를 따지면 유럽은 과연 떳떳할 수 있나? 소위 근대로 부르는 시기 이후 역사에 기록된 끔찍한 전쟁 대부분은 유럽인들끼리의 전쟁 또는 유럽인이 일으킨 정복전쟁이지 않았나? 

이쯤 되니 다른 뉴스도 불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는 난민의 행렬이 국경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는데, 폴란드,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 등 이웃 나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 팔 벌려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뉴스가 그랬다. 전쟁으로 발생한 인도주의 위기에 맞서 발휘된 유럽인들의 '우리가 남이가' 정신에 입각한 따뜻한 원조는 당연히 칭송받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시리아 내전 이후 살기 위해 지중해를 건너던 난민들을 향해서는 온 유럽이 '응, 우리는 남이야.' 태도로 일관하지 않았나. 물론 언어도, 인종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 수십, 수백만 명이 몰려들 때 문을 걸어 잠그는 반응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다분히 있다. 그러나 헝가리 같은 경우엔 시리아 난민을 걷어차고 아이를 안고 허겁지겁 도망치던 아버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기자를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갔던 나라다. 5년 전 난민들은 유럽연합이 쳐놓은 철조망 앞에서 좌절했다. 지금 난민들은 다행히 피부색도 같고,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덕분에 환대받는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유럽 국가들의 지원, 난민을 환대하는 유럽인들의 우애를 잘못됐다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도 전쟁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겪을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있으니 나보다 더 곁에서 위로를 건네고 어깨를 내주는 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보편의 가치는 보편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전제를 달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 일 같지 않아서 두 팔 걷고 돕는 것도 좋지만, 남 일 같더라도 잘못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더 나쁜 전쟁, 덜 나쁜 전쟁이란 없다. 다 똑같이 나쁜 전쟁이다.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은 똑같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다. 피부색에 따라, 종교에 따라 나뉘는 난민의 계급 같은 건 없다. 

동시에 우리는 보편의 가치를 보편적인 기준에 비춰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통에 피란길에 나서야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라서 내가 난민의 처지에 더 공감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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