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입사한 첫 직장, 알고 보니 블랙기업? (10)
글을 쓰는 오늘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다. 세상에 모든 직장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정 기념일이지만 국경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도 출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공휴일이 아니라서 대체 휴가를 받을 수 있는 날도 아니지만 휴일 근무 수당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것 또한 지키지 않는 회사가 있기는 할 것이다. 아직도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나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힘들고 지친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퇴사는 늘 곁에 있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유명한 일본 드라마가 있다. 나의 첫 직장 퇴사는 딱 하나의 수식어만 붙여야 한다면 도망이었다. 그러나 그 도망은 나에게,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
나의 첫 퇴사는 설렘이 가득했었다.
취준생일 때 그렇게 간절한 취직이었는데 정말 아이러니하다. 내 첫 퇴사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다른 직장을 어떻게 구할지에 대한 걱정도 전혀 없었다. 그저 지옥과도 같은 회사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첫 직장에서의 기억을 글로 남겨보면서, 만약 내가 사회 초년생이 아니라 조금은 성숙해지고 경험이 쌓인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A사에 들어간다면 그때와 다른 날들이 펼쳐질까 라는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업무가 힘들고 버거울 때,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내가 그때 퇴사가 아닌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의 끝은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내가 퇴사하지 않았더라도 (도망치지 않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블랙회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곳에서 그저 도망칠 뿐.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고 지내온 첫 직장에서의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버티던 하루하루들, 게다가 떠나는 그날까지 업무와 막말에 홀로 버텨야만 했던... 스스로에게 잘 참았다고 대견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는 퇴사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홍콩 여행을 선물했다. 퇴사하고 바로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떠난 것이 지금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때 나는 모두가 직장인인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지 못해 혼자 처음으로 해외여행 가게 되었다.
침사추이의 거리, 홍콩의 멋진 야경, 우연히 들어간 연어 피자가 맛있었던 곳, 매일 먹었던 딤섬, 길을 헤매는 나에게 언제나 친절했던 홍콩 사람들... 저렴한 여성 전용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는데 숙소에 함께 묵는 사람들과 잠시 자기 전에 육포와 맥주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눴을 때 다들 퇴사를 하고 혼자 여행을 온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다들 힘들었고 고생했고 그 과거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이제 행복한 일만 남았다며 입을 모았다.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평일에 내가 사무실이 아닌 홍콩의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이 황홀했다. 이때의 기억을 가지고 나는 이후에 다른 나라들도 혼자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첫 직장을 퇴사하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두려울 것이 없었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 문득 A사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클럽 가는 게 취미였던 대리는 밤새 술을 마시고 출근해서 술냄새가 풀풀 나고는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한참 일을 하든 말든 해장으로 컵라면을 자리에 앉아서 먹어서 사무실 전체에 냄새가 퍼졌었다. 아직도 술 그렇게 진탕 마시며 살고 있을까?
별 거 아닌 일로 나에게 소리를 지르던 다른 팀 주임은 아직도 A사에 다니고 있을까? 다른 회사로 옮겼다면 그 성격은 달라졌을까? 같이 일만 하면 모든 업무를 과부하하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했던 실장은 지금은 뭐 하며 살까?
그런 궁금증이 하나하나 생기다 보면 그 사람들의 근황은 알 길이 없으니 A사를 잡플래닛에 검색해 본다. (이건 헤어진 연인의 SNS에 들어가 보는 것과 같은 마음일까?) 잡플래닛을 보면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보통 3점 이상이면 좋은 회사고 2점 이상이면 그럭저럭.. 회사가 뭐 그런 것이라는 느낌이라면 1점 대면 거르는 회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A사는 몇 년간 아주 꾸준히 1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평가하는 모든 사람들은 A사의 악행들을 고발하고 있으며 내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가 겪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수많은 후기들을 가끔 읽어 본다. 그러다 간혹 5점을 주며 적응을 못하고 퇴사를 한 사람들이 나쁘다는 후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중에 A사에서 친했던 동료에게 들어보니 이건 잡플래닛 평점이 너무 안 좋아서 대표가 직원들에게 좋은 평점을 남기도록 지시해서 남긴 보여주기성 후기였고, 그 외에도 너무 심각한 수준의 고발 평가들은 신고를 해서 많이 삭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평점 내용을 조작하려고 하는 마인드를 보면 결국 변하지 않는 곳이다.
변하지 않을 곳이다. 영원히.
혹시라도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명백한 블랙 기업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먼저 같은 길을 겪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꼭 말해주고 싶다.
회사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고, 장점이 전혀 없고 단점이 수도 없이 많은 블랙 기업에 다니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면 참지 말고, 망설이지도 말고 퇴사를 하라! 좋은 회사를 찾기는 힘들지만 더 나은 회사를 찾을 확률은 그보다 높고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은 소중하다. 회사에서 늘 마음 아파하며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버틸 필요는 없다.
직장인은 너무나 쉽게 회사가 생활의 거의 대부분이 되어버린다. 그걸 너무 잘 알아서 회사 생활이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울 지 항상 공감하고, 언제나 마음이 짠하다. 그래서 퇴사를 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응원하고 싶다.
취직은 선택받아야 가능하지만 퇴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지옥 같았던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나 블랙 기업 A사와 안녕했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내 인생에 손꼽는 탁월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