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이지만 신입 무기 계약직입니다 (1)
나는 첫 직장을 퇴사할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리 다음 직장을 알아보고 그만두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었지만 과로사로 죽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퇴사를 먼저 해버렸다.
그렇게 또다시 직업이 없는 상태로 몇 달을 지냈지만, 이상하리만큼 재취업에 대해 크게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간절하게 바라고 원했던 첫 직장을 새까만 블랙기업으로 호되게 경험하고 나니 첫 취업할 때만큼의 회사에 대한 열정은 많이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나는 굉장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세상 어느 회사에 들어가도 첫 직장보다 나을 것이라는 웃픈 자신감이었다. 게다가 사회생활을 경험해 본 짬바(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으니 처음 취직을 할 때처럼 어리바리하지는 않을 자신이었다.
첫 직장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생긴 재취업의 조건은 명확했다. 길어지는 취업 준비 기간에 치어서 "뽑아만 주신다면"이라는 절박한 마음이 없어지니 직업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생긴 것이다.
재취업의 조건
1. 출퇴근 시간이 편도 1시간 이내여야 한다.
경기도민에게 1시간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목적지까지 가는 소요 시간의 깔끔한 기준이 된다.
경기도에 살면 1시간 이상이면 많이 걸리는 것이고, 그 이하면 적당하다는 거리 감각을 가지게 된다.
출근하면 무조건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게 되는데, 출퇴근 시간까지 왕복 2시간을 넘으면 하루에는 온전히 회사 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을 피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서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왕복 거의 3시간 30분인 회사를 고민 없이 다니고자 한 첫 직장에서의 내가 미친 것이었다.
2. 월급이 세전이라도 좋으니 200만 원을 넘어야 한다.
200만 원은 어떤 숫자일까?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두 번째 회사에 취직 준비를 할 2015년을 기준으로 평균 연봉을 검색해 보니 그 당시 평균연봉은 3,281만 원이었다. 중간 순위인 근로자의 연봉을 보면 2,500만 원으로 단순히 1년 12개월로 나누면 한 달 월급은 208만 원 정도가 된다.
나는 그 가장 평범한 돈이 필요했다.
200만 원이면 집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생활하는 기준으로 내 생활도 하면서 저금도 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주 싼 값에 내 노동력을 판 적이 있었고 그래서 남은 건 건강 악화와 피폐해진 정신 상태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값비싸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금액 이상은 보장받고 싶었다.
3. 대행사 업무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1년 반이라는 짧은 경력이지만 홍보 경력으로 재취업을 준비한 나는 한 사람이 수십 개의 브랜드를 담당자로 근무하는 대행사 업무보다는 인하우스로 가서 전문적인 홍보 경력을 쌓고 싶었다.
대행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내가 본사 담당자라고 불렀던 위치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직종이던 상관은 없었지만 하나의 명확한 브랜드를 제대로 홍보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재취업 준비를 해 나갔다.
4. 남녀 화장실이 나뉘어 있어야 한다.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A사를 다니며 화장실 문제로 고생 아닌 고생을 해서 남녀 화장실이 나뉜 건물의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회사에서 지내기 때문에 화장실이 편하지 않으면 고생한다는 것을, 변비가 생각보다 심각한 병이라는 것을 깨달은 내가 가진 소박한 기준이었다.
여유가 있으니 조급함이 없었고 명확한 재취업의 조건이 있으니 가고 싶은 회사들이 쉽게 추려졌다. 나는 홍보 경력직으로 몇 군데 회사에 지원했고, 운이 좋게 면접을 본 곳들이 있었으며 그중 B사에 최종 합격했다.
B사는 의료계 중소기업이었는데 나의 재취업 조건을 모두 부합하는 곳이었다.
내 조건 이상의 좋은 점들도 있었다. 무려 회사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해서 점심값을 아낄 수 있었다. 또 일 년에 큰 행사가 있는 하루 이틀 정도를 빼면 매일 칼퇴근을 보장한다고 했다. 게다가 업무 강도가 약해서 여성들이 결혼해서 집안일을 병행하며 다니기 좋은 회사라는 설명까지 들었다.
또한, 남녀 화장실은 제대로 갖춰져 있을 뿐 아니라 사무실과 화장실 청소는 직원들이 아닌 외주 업체 청소 직원분들이 해주신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정말 이상적인 회사였다.
나는 더 이상 치열하게 일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고 게다가 내가 생각한 재취업 조건을 뛰어넘는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점 또한 존재했다.
바로 내가 다닐 포지션이 무기 계약직이라는 것이었다. 계약직에 대해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B사 인사 담당자에게 무기 계약직은 계약이 1년 단위로 자동 갱신되기 때문에 정규직이랑 똑같다는 말만 듣고 그런가 보다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정규직이랑 똑같으면 정규직을 시키면 되지 왜 무기 계약직을 하는 거지 라는 의문조차 없었다. 그보다도 B사는 주 6일 근무제도였는데 이걸 감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아주 짧았다.
내가 생각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고, 업무 강도가 약한데 주 6일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재취업에 성공했다.
어찌 보면 내가 생각한 B사의 수많은 장점은 내가 첫 회사에서 경험했던 것들에 의해 생긴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부분이었고 나는 또 덜컥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 안일한 생각에 정말로 힘든 부분은 회사를 다니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다는 것을 또다시 망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