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실패가 익숙해졌던 때가 있었다.
흔히 무언가 도전할 때 사람들은 성공을 그린다고 한다.
나는 무엇도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루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때였다.
어렸을 적 많은 도전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공계에 꿈이 있다 믿었다. 그랬기에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많은 대회를 나가고, 교육청과 여러 기관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원에 지원했다. 매일 밤을 새워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보고서를 만들고, 발표준비를 하며 힘들었지만 참 즐거웠다. 그때의 나는 그 노력들이 헛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많은 수상을 했고 지원한 교육기관에는 늘 합격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비상하고, 머리가 좋고, 사고가 기발하다고 말이다. 어릴 적 연이은 내 성공의 바탕에는 노력도 있지만, 비범함이 작용했다고 믿었다. 그 시절 나는 담임 선생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늘 그런 말들을 들었다. 그 사이에서 난 그에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안했던 것 같다.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 그들과 나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그런 중학교 시절이 끝나며, 인생에서 처음이자 가장 큰 실패가 왔다. 그때, 늘 그려오던 이상적인 삶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영재학교에 떨어졌다. 일반고에 진학해야 했다.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 느낌이었다. 그저 그렇고, 평범한 진짜 내가 드러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 내가 영재학교에 가고 싶던 이유는, 주위가 기대하는 내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연구엔 큰 흥미가 없었다. 과학은 그럭저럭 재밌었으나 수학은 지겨웠다. 그런 내가 준비에 온 뜻을 다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홀한 나를 바라보며 아마 결과를 예측했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여태 성공했으니까, 관성적으로 이번에도 성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요행을 바란 일인지, 부끄러운 사고였다.
고등학교부턴 암흑기였다. 그 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입학 당시만 해도 이건 아무것도 아니며,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인생과 대학이라는 응원을 들었다. 입학식에서 우수신입생 선서를 맡은 후 초반은 그래도 열심히 했었다. 영어교과서의 지문을 온점 하나, 쉼표 하나까지 전부 외웠다. 우리 학교에는 전교 10등까지만 이용할 수 있는 독서실이 있었다. 배치도 1등부터 좋은 자리가 주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왜 그때는 나도, 친구도, 어떻게 다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첫 중간고사에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 독서실에서 떨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는, 성적은 충분했단다. 하지만 담임이 날 자극시키겠다며 임의로 제외했다고 했다. 독서실에서 떨어졌을 때 무슨 기분이었더라, 내가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창피하고 비참했다. 실은 그 뒤의 내 모습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의 나를 돌아보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학교에 가면 잤다. 자다 보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됐고, 자습실로 이동해서 잤다. 온종일 자다가 집에 오면 게임을 하거나 핸드폰을 했다. 늘 그러다 동이 텄다. 그럼 다시 학교에 가서 잤다.
꿈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자는 것과 게임뿐이었다. 먹는 것도 귀찮았고 짜증도 늘었다. 교내 대회에 도전해 보자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 덜컥 겁이 났다. 또다시 내 무능함이 증명될 것 같았다. 분명 첫 실패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무덤덤한 척했으나, 그즈음에는 실패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노력하지 않았기에 실패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신청 기한이나 마감일을 어겨 실패한 게 절반이 넘었다. 노력해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여전히 학교에 가서 자고만 있었음에도 엄마와 선생님은 그때 내가 바라볼 수도 없는 대학들을 말했다. 당연히 거기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마치 죽을 날을 받아 둔 기분이었다. 내 예전 핸드폰 달력에는 수능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 죽는 날로 기록돼 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졸업을 하고도 곧바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3년을 놀았다. 3년 동안도 게임만 했다. 학원은 다녔지만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만 살 수는 없으니 적당한 대학교의 공대를 갔다. 아무 노력도 안 해놓고도, 외면하던 내 현실을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학교를 갈 때마다 괴로웠다. 결국 몇 년 못 다니고 휴학했다.
내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룬다는 상상이 안 됐다. 아무리 공부해도 그 자리 같았다. 그때도 열심히 했던 시기들은 있었다. 처음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공부할 때, 대학교 신입생 때, 그렇지만 실패가 일상이 된 머리로는 최선을 다하다가도, 행동의 의미를 잃어 금세 관두고는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다. 휴학 2년째가 되던 해 2월에, 다시 시작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나이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문득 처음으로, 이것은 지레 하는 걱정의 모습을 한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안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연속된 실패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나를 지키기 위함인지 모든 걸 무의미하다 여기던 사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했다.
학원에 다녔다. 여름까지는 아침에 알바를 갔다가 오후에 학원에 가 밤 11시가 넘어 집에 왔다. 가을부터는 아침 6시에 집에서 출발해 밤 11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이었다면 잠과 딴짓으로 버릴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다시 공부했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그제야 실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기 또한 내 아픈 6년 중 한 해다. 멀쩡한 정신으로 학원에 다니지 못했으므로 열심히 했으나, 얼마만큼의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가고 싶던 대학에 4년 전액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정말 오랜만에 맞은 성공이었다. 어쩌면 성인 이후 처음 겪은 성공이었다.
오히려 거짓처럼 느껴졌다. 분명 높은 성적임에도, 내가 맞았다는 사실로 낮아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실패에 무뎌져 스스로부터 나를 매도하고 있었구나.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할 거라 포기하게 했구나.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폄하하던 건 나였다.
나는 그 후로 너무나 바뀌었다. 모든 과제는 기한이 10일 이상 남았을 때 시작하여 여유롭게 끝냈다. 공부도 시험이 닥쳐서 하지 않았다. 늘 수업에 집중하고, 복습하고, 시험 2주 전에는 공부를 시작하여 시험기간에는 오히려 더 이상 할 공부가 없었다. 시간이 남으면 두 달 남은 과제여도 미리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하는 내가 좋았다.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다시 겪은 오랜만의 성공에 기뻤다. 나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 성공이 반복되자, 나는 다시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단지 성적뿐 아니라 나는 노력 속에서 크게 발전했다. 열심히 할수록 깊은 사고와 넓은 지식을 갖게 됐다. 한 학기가 다 지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았다.
약 10년의 세월이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포기만 해오던 때였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리 돌아봐도 그때의 내가 완벽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남을 보는 것 같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헛된 세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가 있기에 지금의 소중함을 느낀다. 누구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나는, 이제 스스로를 가장 믿어주는 내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실패가 아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어렸을 적처럼 나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나는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 겪은 실패에 자신을 부정했다가, 다시 겪은 실패에 내 모습을 그에 못 박은 듯 고정했다. 습관적으로 나를 낮추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나를 막고 있었다. 다시 노력했고, 처음으로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 뒤로도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노력할수록 스스로가 나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긴 늪 같은 세월, 안쓰러운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를 믿어달라고.
하지만 괜찮다. 아마 말해도 그때의 나라면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모든 건 결국, 스스로 느껴야 하는 걸 알았다.
그 시절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실패도, 멈춤도, 결국은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