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오늘은 내 삶에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바로 충동이다.
나는 반년 넘게 정해진 식단을 지키고 반나절 넘게 가만히 앉아 일을 하는 등 잘 참고,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 나는 가끔, 참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은 음식이기도 하고 소비이기도 하고 술이기도 하고 가족과의 다툼이기도 하다.
충동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성적인 사고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여기서 그만 먹고, 그만 쓰고, 그만 마시고, 진정해야 하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도무지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지갑은 점점 가벼워지고 술에 기억이 없는 날은 늘어간다. 가족과 싸울 때마다 화해가 아닌 관계의 끝만이 그려진다. 지금 돌아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이 충동성에서 시작됐다.
나는 주로 앞의 네 가지에서 충동적인 면을 보였으나, 생각해 보면 각자에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달랐다. 음식을 참으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돈을 못 쓰면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고, 술을 못 마시면 자리가 지겹고 불편하게 느껴졌으며, 엄마에게 내 화를 그대로 보여주면 뿌듯하고 해방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남들보다 인내심과, 충동을 감내하는 능력이 부족한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굉장히 잘 참는 사람이었다. 긴 세월 다이어트라는 명목으로 음식을 참아왔고, 내 지갑 상황보다 한참 비싼, 그렇지만 너무 갖고 싶었던 물건들을 참아왔으며,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내 감정을 죽여 남들의 마음을 참아왔고, 엄마와의 기나긴 오해로 내 마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일방적인 화를 들으며 참아왔다.
이 충동은 긴 인내의 결과와도 같은 것이었다. 결국 터져버린, 빠져나갈 틈새 없이 내리눌러만 왔기에 비정상적으로 커져 다가온 파국이었다.
사고라는 게 참 이상했다. 참을 때는,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돌아왔다. 더 크게. 더 충동적인 형태로. 처음 몇 번은 다시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참을수록 더 큰 충동과 함께 돌아왔다.
그즈음엔 그래, 나도 한 번쯤은, 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토록 큰 해방감을 맞은 적이 있었을까. 살아있는 것 같았고 내 존재가 느껴졌다. 밀가루와 설탕 덩어리들을 집어 먹으며 만족감을 느꼈고, 잔고를 신경 쓰지 않고 돈을 쓰며 내가 무언가라도 된 기분을 느꼈다. 술에 취하여 주변을 덜 신경 쓰며 편안하게 상대를 대하는 내 모습이 좋았고 엄마에게 나도 화났다고, 나도 이만큼 억울하고 불쾌하다고 소리치며 통쾌함을 느꼈다.
그때 감정을 떠올리면 참 이상하다. 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다. 자각하지 못했던 순간에도 참기만 했던 시간이 억울했던 걸까. 그 시간을 정당화하기 위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래도 된다, 나는 이럴 자격이 있다, 이런 생각을 말이다.
한번 고삐가 풀리니 한동안은 전과는 정반대의, 절제 없는 삶을 살았다. 어느 날이었다. 잔고가 거덜 났다. 일주일에 6번은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고, 집에 오면 해가 떠 있었다. 엄마와 마찰이 잦았고, 술을 줄이라거나 일찍 들어오라는 엄마의 당연한 말들에조차 화를 냈다. 심지어는 싸움 도중 고가의 모니터를 망가뜨렸다. 오랜만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미 충분히 충동적인 일상을 살아온 후였기 때문일까. 그제야 부서진 모니터 앞에서 조금 이성적으로 나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내 모든 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이었을까. 눈앞의 너무나 참기 힘들던, 하고 싶은 것들만을 따르던 이유를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행동들이 주는 감정에만 이끌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여태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며 나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겨우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나는 완벽히 나를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참는 게 아니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내리눌러 단단하게 압축하고 있던 거였다. 어느 날은 반드시 터져 나올 형태로 말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살아가던 그때에도 여전히 참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먹을 걸 찾으면서도 다른 때엔 식단을 조절하고, 과소비를 하면서도 돈을 아껴 필요한 것도 사지 않고, 감정이 무거워 술을 마시면서도 심하게 주위를 살피고, 엄마에게 화를 내면서도 늘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충동은 숨을 쉬기 위한 돌파구였다. 과한 억압 속에서 살기 위해 알아달라고 외치던 내 목소리였던 것이다. 단순히 충동을 참아보자, 다시 예전처럼 날 인내하자, 라는 생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제야 왜 충동을 따르며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늘 어떤 기준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지워오던 내가, 진짜 나로 등장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느낌을 나는 자유로 오인해 버린 듯했다. 자유와 충동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스스로 억압하던 것들을 따르며 자유를 느꼈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가 아닌 억눌린 것들의 분출이었다.
분명히 충동은 내 삶에 많은 고난을 가져왔다. 참아야 하고 없애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게 피상적으로 다가갈 요소가 아니었다. 무턱대고 참는 것은 더 큰 충동으로 돌아옴을 알았다. 충동을 따르지 않더라도 나를 숨 쉴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폭식을 일으키던 절식을 자제하고, 일상적인 식사 속에서 내게 음식을 허락해야 한다. 과소비를 불러오던 과한 절약이 아니라, 적당한 소비 계획 속에서 필요한 것은 사야 한다. 자꾸만 취하게 만들던 남을 살펴 내 감정을 죽이던 습관을 줄이고, 취하지 않아도 나를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늘 끝을 그리듯 엄마에게 화를 내게 만드는 마음속에만 쌓아오던 버릇을 고치고, 일상의 대화로 앙금을 풀 수 있어야 한다.
충동이 있기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참으면, 참아지는 줄 알았다. 오히려 그 인내 속에서 스스로를 가치 있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강박적으로라도 나는 잘 참는 사람이니까, 라는 생각 속에서 억압받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더욱 내리눌렀다. 충동은 내면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나의 적,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일상 속에서 충동들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나는 충동을 없애려고만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담긴 나의 말들을 듣고 싶다. 절제가 아니라 돌봄으로, 억압이 아니라 이해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알았다. 그렇게 매일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충동들과 함께하면서도, 조금은 약해진 것을 느낄 때마다 나를 보다 편하게 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충동은 나를 망가뜨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진심으로 마주하게 했다.
나는 이제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