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언제부턴가 나는 많은 것에 무신경해졌다.
아무리 두껍게 휴지를 말아도 절대 벌레를 잡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신체에 벌레가 붙어도 아무렇지 않게 털어버리고 만다.
조그만 고통도 무서워 주사 맞기를 두려워하던 내가, 이제는 알바 도중 기계에 살점이 찢겨도 아픈 티 하나 내지 않고 퇴근까지 버틴다.
겁이 많아 새벽엔 화장실도 혼자 못 가던 내가, 이제는 늦은 시각 불이 모두 꺼진 집안에서 공포물을 보아도 전혀 무섭지 않다.
나는 예민하지만 무신경하다. 타인의 사소한 기분 변화에도 늘 촉을 세우고 있으면서 내 주변 환경은 무언가가 부서지든, 쏟아지든, 어떤 사고가 일어나도 무던했다.
처음부터 정말로 괜찮았던 걸까 생각하면 모르겠다. 사실 처음에는 평온함을 연기했었다.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벌레가 무섭다며 겁을 먹은 동료를 위해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은 척 떨리는 가슴을 쥐고 벌레를 잡았다. 일을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나는 아마 예민하다는 말이 싫었던 것 같다. 무던하고 평온한 사람, 감정의 동요가 적은 사람,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는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다. 말투 하나, 눈빛 하나, 그 작은 모습에도 쉼 없이 생각하며 감정은 시시각각 변한다. 사실 나는 그런 내가 싫었다. 아무 의도가 없는 말일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부끄럽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니 다른 것들에서 부단히 노력하여 주변에게 예민하지 않은, 무던한 사람으로 남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나를 연기하며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지독하게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다. 분명 무던함을 흉내 내던 나는, 그즈음부터 정말로 모든 것에 둔감해졌다. 벌레, 귀신, 물리적 고통, 그런 것들에 무감각해지고 내 마음은 온통 어둡고 축축한 방 안에만 갇혀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고 싶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으냐고 기겁하며 걱정하는 주변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예전의 내 마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수 있다는 건, 내게 그만큼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구나.
그토록 원하던 무신경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무던해졌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기민하게 주변의 변화를 느꼈지만 혹여나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까 매사에 눈치를 보던 나는, 정말로 내가 어떻게 보이든, 누군가 내 욕을 하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여유가 없는 와중에도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혼자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나 때문에 못 가고 있는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차를 살피며 빠르게 걸을 만큼 과하게 눈치를 보았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움받을 용기가 생긴 것은 아니다. 용기로 표현되기엔 별 것 아닌 감정이었다. 그냥, 미워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극단적인 사고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어쩌면 무던해졌다 보다는 무엇도 내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 상황에 가까웠다.
흉내 내오던 무던함을 막상 마주하니, 그것은 빈 껍데기 같고 감정의 역치가 너무나 높아진 흑백의 삶이었다.
내 삶이 점점 평면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선 이전보다 편안해졌다. 한 번씩 이제 나는 남의 마음까지 전부 돌볼 여유가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옛날의 나는 그만큼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공간이 남아있었구나, 하는 그리움이 들었다. 나는 언제 내게 남은 여유를 다 써버린 걸까. 나를 위해 사용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긴 어둠 끝에 원래부터 조그만 공간이었던 것 마냥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긴 예민함 끝에 내 마음이 선택한 하나의 생존 방식일지도 몰랐다.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과하게 주변을 의식하고, 무던함을 연기하던 내게, 깊은 우울의 위기 속에서 더 이상 그럴 필요 없도록 마음을 메워버린 것이다.
무신경해졌기 때문에 우울 속에서 살아남은 걸까. 덜 피로한 삶이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무던한 내가 기묘하게 느껴진다. 어색하고 무언가 결여된 것처럼. 종아리에 쥐가 나도 소리 하나 내지 않는 나를 보며 옛날의 나라면 죽을 것 같다고 느꼈겠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의 내 색채와 채도가 부러워진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내가 지금처럼 무던해졌듯이, 지금의 나도 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예민함을 되찾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신경함은 지금의 내게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전처럼 다른 나를 연기하고 지금의 나를 억지로 바꾸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만약 다시 모든 게 내게 중요해지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나를 차분하게 돌아보듯이 그 마음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내 마음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지금처럼 끝없이 생각하며 나를 마주할 뿐이다. 그렇게, 외면하기보다는 모든 순간의 나를 바라보며 이해하고자 한다. 예민함과 무던함이 공존했던 마음 안에서, 그저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