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한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다. 어울려줘서 고마워, 얘기해 줘서 고마워, 들어줘서 고마워. 누군가를 만날 때면 습관처럼 뱉고는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은 붙잡음이었다. 계속 나와 지금처럼 지내달라는 호소처럼.
타인의 감정을 소모시키는 것이 미안했다. 혹여나 나를 귀찮게, 번거롭게 여길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싫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의 감정뿐 아니라 나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누군가 그만큼의 마음을 쓸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 남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그것들로 나 스스로를 끝없이 낮추고 있었다.
5년쯤 전이었을까,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랬다. 그날도 습관처럼 즐겁게 어울리고 난 후 헤어진 순간 내 모든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실수들이 떠올랐다. 잘 들어갔냐는 친구의 연락에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해버린다. “오늘 놀아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피곤했지, 난 너 덕분에 너무 재밌었어.” 그러고는 괜히 유쾌한 척, 한 마디 덧붙인다. “늘 견뎌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날 견뎌야 해.”
그 친구는 확인했음에도 몇 시간 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 즘 드디어 연락이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내가 널 견딘다고 생각하는 거야,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신경 쓰고 있었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언뜻 본 미리 보기에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분명 텍스트로 이루어진 메시지임에도 친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귀에 닿는 듯했다. 그 이상한 기분에 나는 한동안 메시지를 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답장할 용기를 갖고 메시지를 눌렀을 때는,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라는 문구만이 어른거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서로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순간이 누군가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어맞기란 힘든 일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분명히 내키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주변의 일이라면 별 다른 불편 없이도, 대부분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토록 일상적인 감정의 흐름을, 유독 나 자신에게만은 허락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주변을 신경 쓰이게 할지도 모른 채 나도, 그들도, 모두를 힘겹게 하며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늘 은연중에 정치적인 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으로, 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며, 상대의 아량에 감사를 표하는 그 모습은 어쩌면 부담스럽게도, 혹은 그 너머의 마음이 느껴져 안쓰럽게도 느껴진다. 그때 친구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도 나는 무심코 한 번씩 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에게 다시 “고마워”라고 붙잡고 싶어진다.
꼭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즐겁게 어울리고 난 후, 그들이 내게 굳이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매 순간 표정으로, 대화로,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믿는다. 나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또, 그런 나와 함께하며 즐거워 보이는 친구들의 모습은 나 또한 그들이 좋아하고, 함께 놀고 싶은 아이임을 느끼게 만들었다.
얼마 전 한 친구를 보았다. 헤어지기 전 그 아이가 말했다. “오늘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다음에도 놀아줘야 돼.” 무척 익숙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실린 감정과 목소리는 늘 내가 뱉던 것이었으니까.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내게 그 말은 문득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그 순간 친구의 마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괜스레 더 과장스럽게 답했다. “저야말로 오늘도 놀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일련의 행동으로 친구가 안심할 수 있길 바랐다. 나도 언젠가 그 말 한마디에 안정을 얻고는 했으니까.
더 이상 내 불안을 덜기 위해 습관처럼 하던 말은 하지 않는다. 친구를 향한 나의 시선, 말투, 몸짓 하나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눈치 보지 않아도, 작은 행동 하나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오히려 그 편안함 속에서 오는 안정이 우리를 더 친밀하게, 나를 더 가치 있게 만들었다.
“고마워”라는 말 대신, 이제는 그냥 웃는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