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언제부턴가 가벼운 말 하나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선을 지키고, 실례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실례의 기준은 나날이 첨예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한마디의 말도 변명 같은 많은 사족이 붙었다. 이 말을 해도 될까, 실례가 아닐까, 하루에도 수백 번 고민하다 보면 결국 안전하고 편안한, 날씨나 오늘 뭘 먹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딘가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마 그들도 나를 똑같이 배려해주고 있음을 알기에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배려라고 여기던 것이 어쩐지 대상이 나에게로 향하자 그들에게 주어지는 부담처럼 느껴졌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끝내 내뱉지 못하게 된다. 궁금해도 묻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삼킨다. 우리 사이의 선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면, 그 머뭇거림이 오히려 그 선을 더 두텁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점점 실례가 되는 말이 늘어간다. 하지 말아야 할 질문, 하면 안 되는 말, 먼저 꺼내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를 이야기들, 참 일상적인 것부터 다소 무거운 내용까지 다양하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예뻐 보이던 친구에게 “오늘따라 더 예쁘네.”라고 하고 싶었지만, 요즘은 이런 말을 하면 안 됐던가 싶어 삼켰다. 지인과 대학교 이야기를 하다 “어느 학교에 다니셨었죠?” 묻고 싶었지만, 이 질문도 실례가 될까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 전반의 감수성이 높아졌기에, 당연한 일이며 필요한 인식이라고 이해한다. 그 안에서 내게 돌아오는 말 역시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요즘 나에 대한 이야기는 스스로도, 타인에게서 주어지는 질문으로도 점점 할 일이 없어진다.
어느 날, 늘 선을 견고히 지키던 지인이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세요?” 그 순간, 그 질문이 왜 그리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감정은 기쁨이었다. 이제 그에게 내가 이 정도는 다가와도 되는 사람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 나에게 조금쯤의 ‘실례’를 해주기를 바라왔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 놓고 해도 되는 사람, 침범을 무던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느 순간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외로웠던 것 같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선 밖에서 그들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것이, 나는 지금 어느 정도로 다가가도 되는 사람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파악하는 것이 말이다.
흔히 말하는 정, 오지랖 따위의 것들을 좋아한다. 어떤 참견은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함을 알았다. 누군가는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걱정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늘 나의 신경은 왜 그 말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한 걸까, 에 향해 있었다.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더라도, 의도를 생각해 보면 종종 약간의 실례마저도 고마움으로 느껴졌다.
요즘 나는 내게 조금쯤의 ‘실례’를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이었으면 고민 끝에 결국 삼켜버렸을 말들을 한 번씩 하고는 한다. 그 뒤편에는 그를 향한 나의 관심과 애정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이 함께 있다. 그렇게 건네진 말들은 내 마음을 전하고 우리의 벽을 얇게 했다.
이제는 내게 먼저 다가오는, 어려운 그 ‘실례’가 참 달갑다. 성큼 다가가도 되는 사람처럼, 나를 향한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감정 속에서 나 역시 더욱 용기를 얻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벽을 허물 용기를.
나는 종종 작은 실례를 건넨다. 궁금한 것을 묻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 실례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례 속에 숨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리라 믿는다. 불편함을 견뎌낼 때 서로를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레 선을 넘는다.
그것이 불편함이 아니라, 마음이 닿았다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