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우울할 때면 추억에 잠기고는 한다.
맨몸으로 장맛비를 맞으며 친구와 물웅덩이를 밟으며 놀기도 하고,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건강한 엄마와 손을 꼭 잡고 놀이동산에 가 있기도 하다.
추억 속의 나는 늘 행복하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포근하고 그리운 느낌이다. 그렇기에 추억에 젖을수록 나는 더욱 서글퍼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그리움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시절의 나를 애틋해하고, 그때의 인연을 그리워한다. 이제야 깨달은 그 순간의 소중함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지나간 기억들을 되새기며 후회하고는 한다.
왜 많은 것은 지나간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 후회의 감정이 싫었다. 나를 책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에 사로잡혔다. 다가올 미래가 아닌, 이미 끝나버린 과거에 붙잡힌 채. 그러면 나는 더욱더 우울해졌다. 추억이 아름다울수록 나는 슬퍼졌다.
내 핸드폰 앨범에는 10만 장의 사진이 있다. 엄마와의 사진, 친구 사진, 내가 한 요리, 예쁜 풍경 그 무엇도 지울 수가 없다. 단지 사진을 지우는 것뿐임에도, 그 순간을 영원히 잘라버리는 것 같아서, 그때를 계속 추억하기 위해 남겨둔다.
그러면서도 요즘의 사진은 금방 지워버린다. 아무 미련 없이 비슷해 보이는 사진들을 가볍게 전부 삭제해버리고 만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그다지 힘든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도 추억은 환상처럼 언제나 부러운 모습이다.
가끔 여름밤이 되면 떠오르는 장면, 온갖 벌레에게 뜯기면서도 친구와 땅바닥에 누워있는 농촌 봉사활동에서의 기억엔 밤바람의 시원함과 반짝이는 하늘의 별만이 가득하다. 그때의 불편했던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모아져 추억과 격리되고 만 듯했다.
왜일까, 나는 변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내 나이, 주변 사람들, 시대와 환경, 그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자꾸만, 묶어놓고 싶어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변하고 있다. 변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마음은, 매 순간 달라짐을 느낄 때마다 서글퍼졌다.
앞날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변화가 버거웠던 걸까, 추억에 메이고, 추억을 쫓을수록 지금에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찾아왔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외로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보는 나의 추억은 어쩌면 실제와 많이 다르다. 안 좋은 기억은 싹둑 잘린 채, 아름다운 순간만을 모아서 그때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지금도 그럴까. 오늘의 일도 힘든 기억은 모두 구석에 묶인 채 편안한 노랫소리, 나를 보며 웃어주던 엄마의 얼굴, 집에 가던 길에 마주한 길가의 예쁜 꽃만이 오늘을 채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작가의 「뉴욕제과점」을 좋아한다. 추억을 따뜻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말한다.
“예감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중 나쁜 일 쪽으로 곧잘 쓰러지곤 했다. 추억이 곧잘 좋은 일 쪽으로만 내달리는 것과는 참 다르다.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삶이란 추억으로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다음에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추억은 나를 과거에 묶어두기만 하던 것이 아니다. 그립고, 때로는 지금을 낯설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추억은 언제나 내 마음을 붙드는 버팀목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절, 나를 움직이게 한 건 다시 그때처럼 웃을 수 있는 날을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런 기억들을 모아 살아가고 싶은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조각이었다.
추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미래에 다시 한번 추억을 그릴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울할 때 추억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절망하지 않았을까. 추억은 나의 삶 곳곳을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것은 절망과 우울에 젖어 있던 내게 나도 모르는 새 내 삶에 애착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행복했던 감정들을 또다시 느껴보고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순간을 견뎌내게 했을 수도 있다.
「뉴욕제과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자, 마지막 문단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버텨오게 한 것은 언제나 ‘조금의 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울할 때면 나는 여전히 추억에 잠긴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임을 알면서도, 또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그리움도 후회도 결국은,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