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나는 유독 눈물이 많았다.
조금만 슬퍼도, 감동받아도, 억울해도, 감정을 다스릴 새도 없이 눈물부터 차올랐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얇은 유리막 같았다.
어렸을 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을 보다가 1년 치 눈물을 쏟은 기억이 있다. 작중에서 짱구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과 고군분투하며 도쿄타워처럼 생긴 탑의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있다. 결국 가족들은 지치거나 적을 잡아두기 위해 퇴장하고 짱구만이 끝까지 남아 탑을 오르게 된다. 여기서 짱구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온갖 멍과 상처를 얻음에도 꿋꿋이 일어나 정상만을 향해 달린다.
이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여기서 느낀 감정은 분명 슬픔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분명 절절히 다가오는 마음이 있었다. 아프고 힘들 텐데도 필사적으로 탑을 오르는 짱구의 모습은 너무나도 절박했고, 안쓰러웠고, 대견했다.
최근에도 그만큼이나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 있었다. <인사이드 아웃 2>였다. 사실 라일리의 첫 등장부터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 시간 반의 상영시간 중 한 시간은 울다 나온 것 같다. 성장한 라일리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게 느껴졌고, 다양한 갈등을 겪고 감정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더욱 성장해 나가는 라일리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애틋하게 느껴졌다. 라일리의 마음이 느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짱구를 볼 때에도 그랬던 것 같다. 짱구의 마음이 상상될 때마다 어쩐지 줄줄 눈물이 난 것이다.
나는 클리셰 중 하나인 입체적인 악인이 아픔을 치유하여 마음을 고쳐먹는 전개에 약하다. <캐릭캐릭 체인지>의 우타우(세라)의 서사에서도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돌아보면, 나는 많은 작품 속에서 늘 인물들을 쉽게 받아들이고 용서했다. 조금만 안쓰럽게 느껴져도 금방 냉혹한 시선을 거두고는 말았다.
아마 현실에서도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이번에는 이해해주지 말자, 모질게 마음먹자, 생각하고서도 또 상대의 아픔이 느껴져 버리면 유해지고 만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 모든 모습이 오로지 상대의 아픔에 공감해서였는지, 스스로가 그 아픔을 알고도 무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말이다.
사실 참 웃긴 것이 나는 내 일에는 잘 울지 않는다. 나와 관련된 상황에서 울 때는 거의 억울할 때뿐이었다. 억울할 때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나는 것도 억울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줄줄 흐르는 눈물에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은 뒷전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기뻐서 운 기억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각종 작품에서 표현되는 기쁨의 눈물이 아직도 잘 상상되지 않는다.
보통 눈물은 슬플 때, 특히 스스로의 감정으로 인해 자주 유발된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의 일보다는 누군가가 안쓰럽게 느껴질 때, 절박한 마음이 느껴질 때, 그렇게 내 마음에 울림을 줄 때 그것이 제일 먼저 눈물로 나타난 듯하다. 어쩌면 억울할 때 나는 눈물 또한 마치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보듯, 스스로가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맞다. 생각해 보니, 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내가 상대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해서, 그들이 내 마음 또한 알아줄 필요는 없다.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쉽게 그리 되지 않는 듯하다. 이랬던 내 심정을 말하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고, 기대에서 벗어나면 또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꾸만 나는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고, 눈물 흘렸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모습인지,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조금 부끄럽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된 건 아니다. 지금 스스로 느끼는 것처럼, 한바탕 조절할 새 없이 눈물 흘리고 난 후에는 그런 나 자신이 어이없어 자조가 나왔다. 정말 웃겨서 말이다. 그러면 쌓이는 것은 없었다. 눈물로 털어버린 건지 남은 감정은 서운함이 아닌 무언가 허무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었다. 확실한 건 그러고 나면 보통 더 이상 그 일로는 내가 힘들지 않았다.
나의 눈물은 공감이었다. 엄마와 싸운 후 화해할 때 흘렸던 눈물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엄마가 그렇게 힘들었는데,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됐다. 외롭게 지내시던 친족의 장례식에서도, 그 이름을 보자마자 그분의 삶이 떠올라 안타까움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숱하게 흘려온 내 눈물들은 그만큼 내가 세상을 마음으로 다가가 보아 왔다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어쩌면 눈물은 내 서운함의 해소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도 적어왔다시피 참 피곤한 성격이다. 스스로도, 날 대하는 주변에게도. 오히려 주변에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더 서운해지는 면도 있겠다.
노력해도 자꾸만 과하게 느껴지는 이런 것들을 자각하게 만들고, 조금은 해소시켜 주던 것도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나는 감정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약한 눈물샘이 늘 곤란했지만, 돌아보면 나를 지켜준 것도 눈물이었다. 다른 이의 마음에 닿을 수 있었고, 내 마음을 견뎌낼 수도 있었다.
세상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는 눈물 많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