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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렸다

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by 장원희

눈이 내렸다. 올해 첫눈은 조금 전 앞서간 이의 발자국을 금세 덮어버릴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외출 길에 마침 눈을 맞닥뜨렸다. 처음엔 조심히 내리던 것이 걷다 보니 어느새 눈보라 마냥 휘날렸다. 가로등빛에 눈발이 부서지며 얼굴로 쏟아졌다. 춥지만, 아름다웠다. 나는 그 시공간이 사라진 듯한 새하얀 무아의 풍경에 잔뜩 눈을 맞으면서도 바보처럼 가만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뺨에 떨어진 눈은 곧 녹아버리며 양 볼을 빨갛게 얼렸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생각했다. 나는 지금 너무도 춥지만, 오늘이 지난 기억 속 이 순간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있겠다. 과거를 떠올렸다. 첫눈이 오던 날의 추억은, 그 속의 추위는 가신 채 벅차고 기쁜 감각뿐이었다.


살면서 죽고자 생각한 적은 많다. 사소한 일부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일까지, 이유도 다양하고, 못 죽은 이유도 다양하다. 대부분은 충동처럼 잠깐 느낀 감정에 곧 진정돼 자연스레 잊었을 것이고, 용기가 없을 때도 있었으며, 정말 사소한-이를테면 내일 내가 보던 만화의 다음 회차가 나오던 날인데-같은 미련도 있었고, 남은 사람들이 불쌍해서도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의 해결책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말이다. 지긋지긋한 순간을 그만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으며, 손 쓸 수 없는 문제 앞에 도피처로써 삼는 경우도 있겠고, 병세에 의한 물리적인 고통 때문에도 있겠다. 종종 다시금 힘든 때가 오면 생각한다. 그냥 그때 죽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행복한 순간이 오면 또 생각한다. 죽었으면 이 기분을 몰랐겠구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변하고 몇 번이고 충동에 쌓인다. 천성인지, 병세인지, 조금만 삶이 어려워져도 죽고 싶다는 생각부터 마음에 가득 찬다.


얼마 전 차범석의 <불모지>를 읽었다. 작품은 자살한 둘째 딸과 자살을 하려 권총을 들고나갔다가 홧김에 강도짓을 해 체포된 장남을 맞닥뜨린 60세 최노인의 절규로 막을 내린다. 최노인은 말했다.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값없는 것인 줄 알았더냐? 너희들 사남매를 길러낼 때 나는 죽음이란 생각조차 못했는데 너희놈들은…… 아…… 이게 내가 얻은 전부야? (마룻바닥에 주저앉으며) 경애야! 경수야! (하며 비로소 방성통곡한다)”

이 작품은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1950년대 혼란의 시기 속 세대 간의 갈등 또한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의 사고가 맞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히 그냥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 죽음은 나만의 도피처가 아니었구나. 우리 엄마, 힘들게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나를 키워낸 우리 엄마에게도 죽음이라는 고통의 출구는 언제나 바로 옆에 있었다. 최노인이 우리 엄마, 그리고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겹쳐 보였다. 이게 자신이 얻은 전부냐는 말, 그보다 최노인의-남은 사람의 비통하고 절망적인 심정을 담아낸 표현이 있을까.


누구나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깨달으니 초면인 누군가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삶-죽음 사이의 갈등을 수십 번은 겪었겠거니 생각한다. 삶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 있듯 이 또한 무엇이 맞고 틀린 건 없다. 모든 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할 일이겠다. 그러나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 더 대단해 보였다. 하루하루를 견뎌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단순한 하루가 아닌 사(死)의 충동을 이겨내어 내일로 나아가는 위대한 군중들, 나도 그 속에 함께하고 싶어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본다. 대개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 내겐 너무도 큰일이었지만, 전부 지나갔다. 어떤 것은 그런 일로 죽으려고까지 했다고? 웃기기도 하다. 흰 눈을 맞으며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지독히 춥고 눈발에 발이 메여버리지만 지나고 보면 그저 첫눈의 추억으로 남은 장면들.

부러 객기처럼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맨 손으로 눈을 한 움큼 움켜쥔다. 불에 덴 듯 손바닥이 온통 얼얼하다가, 그조차 모를 정도로 무뎌질 지경에 이른다. 잔뜩 언 손을 뒤늦게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생각한다. 이 아픔도 추억이 되겠지. 그렇게, 눈발이 발자국을 덮듯 순간의 힘듦 또한 축척된 시간 속에 편평하게 묻혀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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