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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혁 Aug 21. 2020

견고한 사랑 프레임과 가정 프레임


 ‘폴리아모리’, 비독점적 다자연애. 두 명 이상의 대상을 모두의 동의하에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미디어에 빈번하게 노출되며 스멀스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개념을 접한 사람들은 ‘바람을 아름답게 포장한 단어’로, ‘정신병’으로 폴리아모리를 표현하며 이에 난색을 표한다. 왜 우리는 새로운 사랑 개념에 이토록 질색하는 태도를 보일까?          



사랑 프레임 : 아름답고, 신성한     


 ‘사랑하기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많은 사랑 영화, 사랑 드라마가 항상 이야기하는 메시지이다. 연애라는 개념이 매우 생소하던 과거와는 달리, 몇십 년 전부터는 연애를 통한 결혼이 일상화되었다. 오죽하면, 연애 전에도 ‘썸’이라는 단계를 거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이 사랑이라 정의되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은 실체가 있지만, 사랑의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기에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보고, 배우며 나름대로 정의했다. 어느 순간, 사랑은 로맨틱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개념이 되었다. 이에, 사랑 프레임은 우리에게 ‘사랑은 꼭 해야만 하는 것,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했다.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며 사랑은 고된 노동을 잊는 마취제 역할을 맡았고, 자본가들은 이를 활용하기 위해 여러 매체에서 사랑을 더욱 ‘좋은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의 활력소의 역할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적인 생각,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져갔다. ‘사랑하니까’라는 한 마디에 목적 있는 결혼과 볼륜들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정당화된다. 사랑은 ‘21세기의 아편’이 되었다.

 미디어의 콘텐츠 속에서 사랑은 끊임없는 모방을 거쳐 깊어졌고, 다양화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며 노출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사랑은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이토록 신성한 개념을 무너뜨리려고 도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사랑이, 일상의 행복이 무너지게 놔둘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 프레임 : 뿌리 깊고, 견고한     


 대부분, 가정의 모습은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오랜 역사와 함께해왔다. 서양에서는 주로 핵가족인 ‘엄마, 아빠, 아들과 딸’로, 한국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확대가족으로 가정을 구성한다. 주말 가족 드라마는 이러한 프레임의 안정성과 보편성을 활용하여 높은 시청률을 받기도 한다.

 사회는 사람이라면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하고, 인생의 목표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몇천 년 동안 노동력 등을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DNA 속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미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이라 낙인찍는다. 가정 프레임은 사랑 프레임의 연상에 서서 더욱 견고히 한다. 이렇듯,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모두가 말하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교육되어왔다.          

사랑 프레임과 가정 프레임을 부수다,     

 우리는 사랑 프레임을 통해 가정 프레임을 완성한다. ‘한 명’의 ‘이성’과의 ‘사랑’을 시작으로 결혼과 자녀의 육아로 완성된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이 생각한 사랑을 이루고 싶은 이들이 사회의 절대적 다수이다. 이러한 프레임 속 행복이 꿈이자 목표인 이들은 폴리아모리에 난색을 보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폭력으로 그들을 비정상적이자 일탈인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사랑 프레임과 가정 프레임을 부수다,     


 우리는 사랑 프레임을 통해 가정 프레임을 완성한다. ‘한 명’의 ‘이성’과의 ‘사랑’을 시작으로 결혼과 자녀의 육아로 완성된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이 생각한 사랑을 이루고 싶은 이들이 사회의 절대적 다수이다. 이러한 프레임 속 행복이 꿈이자 목표인 이들은 폴리아모리에 난색을 보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폭력으로 그들을 비정상적이자 일탈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프레임 밖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들은 서로의 동의 하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다수의 폭력으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만인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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