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을 기다리며
자의도 타의도 아닌 워커홀릭
콩콩이를 임신하기 전까지의 일상은 정말 내가 생각해도 미친 스케줄이었다. 근 1년간 있던 콘텐츠 회사에서는 미친 업무량으로
input = 밥먹듯이 했던 야근과 새벽 퇴근 & 수면 부족
output = 새치녀 입성과 건망증 악화
라는 결괏값을 도출해 냈다.
프리랜서 생활을 탈출하고자 나름 야심 차게 방송국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뽑기에 실패했던 거다. 그래도 그 회사에서 나름 재미있었던 점은 불륜 커플 때문에 코난에 빙의하며 도파민 팡팡 터지는 일상을 보냈던 점이었다. (아무래도 난 도파민의 노예가 맞는 듯하다)
무튼 우여곡절 끝에 퇴사를 하긴 했는데 쉴 틈 없이 바로 일을 하게 되었다. 곧이어 다른 일까지 연달아 하게 되어 얼결에 투잡러가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돈은 2배로 벌었는데 그 시절보다는 워라밸은 더 나았으니(진짜 이때도 미친 스케줄이긴 한데 저때보다 나았던 거다) 프리랜서란 정말 장단점이 명확하긴 하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나는 임신 16주 입덧이 서서히 줄어들던 바로 그 시기, 공연 프로그램 막바지였던 12월 초에도 3주짜리 단기 생방을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2년은 정말 말 그대로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모르게 살았던 거다.
일할 때는 카톡이 하루를 쪼갰다.
한 박자 쉬고 “출연자 누구 왔습니다”
두 박자 쉬고 “섭외 확인 부탁”
세 박자 마저 쉬고“대본 수정 반영했어요”
같은 문장들이 나의 하루를 연주하는 리듬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명실상부 임산부&백수!
그렇게 상단에 고정해 두었던 단톡방에서 하나씩 조용히 나왔다.
새해가 되자 정말 말 그대로 뚝!
갑자기 하루가 조용해졌다. 시간표가 비었다는 느낌보다 먼저 다가온 건 소리의 부재였다. 세상에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다니! 이제 알람은 스팸 문자밖에 없잖아! 하긴 1년 동안 내내 요란하던 단톡방도 이제 나갔지 않나.
'조용한 핸드폰'이라니 너 좀 낯설다...?
후쿠오카에서 맞은 새해
그렇게 12월의 마지막 질주를 마치고 남편의 겨울 휴가에 맞춰 태교여행으로 후쿠오카에 갔다. 하지만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늦게 예약해서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숙소는 눈팅만 하다가 누군가 취소한 방을 겨우 건졌다. 기대를 품고 내렸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 토했다. 아니 끝난 거 아니었어?!
역시 방심은 금물이었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기 전이었나 보다. 그래도 낭만은 있었다. 카운트다운 대신 일본의 숙소에서 남편과 새해를 맞았다. 숙소 창문에 김이 맺혔고, 나는 마시지 않았지만 남편은 맥주를 한 캔 열었다.
다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본은 1월 1일이 설날이었고, 우리가 갔던 시기는 명절이라 닫은 곳이 많아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 구역 뒷조사 전문가, 자료조사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정말 급하게 아무것도 없이 온 탓이었다.
그래서 나의 태교여행은 신기하게도 단 한 곳도 ‘완벽하게 성공’ 하지 못한, 내 기준 최초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것'을 나누기도 했다. 조금만 걷기, 메뉴 타협하기, 숙소에서 더 오래 쉬기. 정말 대부분의 식사를 편의점에서 해결해야 했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래서인지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쉬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1월부터 5월 출산 전까지는 자잘자잘한 각색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쉬었다. 막상 쉬니까 하루가 길었다. 손이 심심했다. 자동으로 켜던 카톡을 몇 번 열어봐도, 새 소식은 거의 없었다. 나 정말 인간관계 어떻게 쌓아온 거지... 하지만 누굴 탓해. 전적으로 내 탓이긴 했다.
오후가 되면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기울었고, 그 시간대가 제일 길게 느껴졌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느리게 지나갔고, 나는 그 느림이 낯설었다. 남편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괜히 시계를 자주 봤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소리가 오늘의 유일한 이벤트처럼 느껴지던 날들도 있었다. 기다림이 일처럼 느껴졌다.
임산부의 하루
특별한 루틴 같은 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잠깐 누웠다가 일어나고, 또 누웠다. TV를 틀어놓고 멍하니 화면만 보다가, 껐다가, 그냥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건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고역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다행이었던 건 잠은 잘 잤다는 점. 낮에도 눈이 감겼고, 밤에는 금세 깊이 들었다. 잘 자는 건 확실히 좋았다.
집에 혼자 있기가 길어지자, 잠깐 친정집에 갔다. 엄마랑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동네를 걸었다. 목표를 정한 건 아니었는데, 걷다 보면 하루에 6천 보는 가볍게 넘었다. 특별한 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괜찮냐고 여러 번 물었고, 나는 대충 괜찮다고 대답했다. 함께 걷는 동안에는 시간도 덜 심심했다. 돌아와 씻고 누우면, 그날은 좀 덜 길었다. 엄마와 보폭 맞춰 걷던 며칠이, 그 겨울에 남은 드문 리듬이었다.
방학으로 연 새해
지난해를 알차게 닫고, 새해는 ‘일하는 나’가 아니라 ‘쉬는 나’로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쉬었고, 막상 쉬니 할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쉬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 없이도 괜찮았던 며칠, 손이 근질거렸던 날들까지 포함해서 나다움을 다시 알게 됐다.
조용한 겨울은 그렇게 다음을 준비시켰다. 전화기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내가 들렸다. 그 겨울의 숙제는 단순했다.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 봄이 오기 전에,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는 것.
곧 있으면 우리 집에 작은 봄이 찾아온다.
콩콩이를 기다리며 보낸 조용한 겨울은, 생각보다 덜 화려했지만 충분히 따뜻했다. 그렇게 느리지만 조용한 기다림 끝에 5월의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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