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춘 투자, 그리고 안락함이 준 짧은 자부심
새 집에 들어와서 처음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된 불편함들
입주 첫날, 도윤은 짐을 내려놓고 거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숙사 생활부터 시작해 경기 자취방, 서울 원룸을 거치며 버텨온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동안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듯, 집은 단지 잠만 자는 공간이었고, 모든 선택이 효율과 절약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생각했다. “이번엔 그냥 버텨보자. 불편해도 한동안은 아무것도 안 사는 걸로.”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현실이 달랐다. 특히 세탁기가 없는 집에서 주말마다 코인세탁방을 오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근처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 반나절이 통째로 사라졌다. 비 오는 날엔 젖은 빨래를 들고 오다가 길바닥에서 물이 줄줄 떨어지기도 했다. 결국 도윤은 세탁기를 샀다.
집 안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빨래가 돌아가는 그 소리가, 세상 어느 음악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아… 이게 진짜 편안이지.” 그날 이후로 도윤은 더 이상 빨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냉장고와 정수기, 야근 뒤의 한 잔이 달라지다
다음은 냉장고였다. 사실 이전에도 소형 냉장고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야근 후 돌아온 집에 시원한 물 한 잔이 없다는 게 은근히 큰 불편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정수기 기능이 달린 냉장고를 골랐다.
설치가 끝나고 처음으로 시원한 물을 따라 마셨을 때, 도윤은 괜히 혼잣말을 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지.” 그 한 잔이 하루를 마무리 짓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로망이던 86인치 TV, 그리고 하늘색 소파의 저녁 풍경
집이 조금씩 채워지자 도윤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입주민 단체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거실 벽을 가득 채운 86인치 TV였다.
결국 도윤도 주문했다. 직구라 배송은 오래 걸렸고, 벽걸이 설치를 위해 벽 타공까지 했다. 설치가 끝난 날, 도윤은 한동안 TV 앞에 서서 화면을 바라봤다. 퇴근 후 불을 끄고 대형 화면으로 영화를 틀자, 집이 더 이상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인 게 패브릭 재질의 하늘색 소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그 소파에 앉아 TV를 보거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도윤은 이제야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실감을 얻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지난 몇 년의 고생이 조금은 보상받는 듯했다.
단지 내 헬스장, 플레이스테이션, 그리고 안락함이 준 자부심
단지 안에 헬스장이 있어 운동도 편해졌다. 굳이 차를 몰고 헬스장을 가던 시절은 끝났다. 퇴근 후 가볍게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간도 절약되고 체력도 달라졌다.
플레이스테이션도 들였다. 가끔 주말에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큰 위로가 됐다. 처음엔 아무것도 사지 않고 버텨보려 했던 집이 이제는 차츰차츰 채워지고 있었다.
도윤은 이걸 단순한 소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나에게 주는 보상이고, 삶의 질에 대한 투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투자에서 손을 놓고, 하지만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마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었다. 아파트에 대부분의 돈이 묶이면서 현금이 없었고, 2019년 말 주식 시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변에서는 코인으로 몇 억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쏟아졌고, 단타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도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조급하게 따라붙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모두 꿀단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2020년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다가왔다.
영국 여행, 그리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
새해가 밝자 도윤은 영국 여행을 계획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도윤은 한국을 출발할 때 마스크를 쓰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영국 공항에 도착하자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출근했고, 카페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행은 즐거웠다. 런던의 겨울 거리, 따뜻한 펍, 그리고 템스강 야경까지. 도윤은 오랜만에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귀국 후, 세상이 무너지는 걸 목격하다
그러나 귀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확진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코스피를 비롯한 글로벌 증시는 폭락했다.
이동과 통행이 제한되고, 회의는 취소되고, 사람들은 집 안에 머물렀다. 세상은 멈춰 서는 것 같았다.
“이건 한평생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았다. 위기 속에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이건 기다리던 신호일지도 모른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과 공감으로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