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니슨 Feb 24. 2024

연봉 1억 원의 여자

주부&엄마의 가치를 찾아서

주부이면서 엄마인 내 연봉은 얼마일까. 무급의 주부에게 연봉은 논할 수 없는 금기 주제일까. 

내 연봉을 책정하고 싶다. 실수령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내 가치를 찾고 싶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 줄곧 수치로 나를 증명해 왔다. 작은 신문사를 거쳐 잡지사, 온라인 매체에 머물면서 나를 평가하는 업무 성과는 숫자에서 비롯됐다. 1면 탑에 기사를 올린 횟수, 온라인 기사의 조회수, 포털사이트에 노출된 횟수와 '좋아요'수. 그리고 연봉 협상 시 제안받는 금액까지 숫자는 자신감이자 자존감이었다.


누군가는 숫자에 목메는 삶을 지양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랬다. 전업주부로 살림과 육아만 하고 있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Image by kalhh from Pixabay


모든 능력을 숫자로 평가받던 내게 살림과 육아는 전혀 다른 세계다. 수치로 평가할 수 있는 거라곤 생활비를 얼마나 썼느냐 정도일 뿐. 그 외의 것은 특정한 기준 대신 주관적인 판단이 평가 방법인데 내 경우 그 기준은 대부분 편에게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해도 남편의 눈초리와 한숨에 업무 평가는 최하위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어쩌다 남편과 다투기라도 할 때 그는 대단한 무기라도 장착한 듯 "그럼 나가서 나만큼 벌어오던가!"라며 큰소리치는데 그 순간에는 자신이 나서서 나를 눌러앉힌 건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다. 때문에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기만 하지?' 같은 자기비하나 자괴감과는 일찌감치 절친을 맺었다.


나조차 나를 낮게 보는 현실도 서러운데 남편의 말 한마디는 몹시도 따갑다. 그는 분명 욱해서 실언을 했겠지만 아킬레스건에 치명상을 입은 이상 못 들은 척 넘길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주부의 연봉을 책정하는 데 열을 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어!!

나도 숫자로 평가를 받아야겠어!!

나라도 나의 가사노동과 자녀 돌봄을 수치로 환산해야겠어!!


인터넷을 뒤졌다. 주부의 연봉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필요했다. 한 때 몸 담았던 직업의 특성상 명확한 자료가 뒷받침돼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만족할만한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주부를 비하하는 글에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렇다면 심리적 데이터라도 확보해야 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주부의 연봉이 얼마라고 생각해?"


"가사도우미를 기준으로 보면 3,000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집안일만 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는데 거의 혼자 케어한다면?"


"그럼 4,800만 원에서 5,000만 원 선?"


"애가 둘이라면~?"


"그럼 조금 더 얹어줘야겠지~? 6,000만 원 정도면 되려나?"


오케이. 근거 자료나 확실한 계산법은 없지만 일단 남편 기준에서 내 연봉이 6,000만 원은 된다는 거네! 내 나름대로 시간 외 수당과 휴일근무수당도 추가하기로 했다. 마침 인터넷 검색에서 어떤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런 식의 계산법을 게재한 것을 봤는데 '아주 현명한 사람이네~'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24시간 상주하며 수시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데다 집안의 대소사에도 깊게 관여해야 하니 수당은 더 받아마땅하다.


그래서 내 맘대로 정한 연봉이 1억 원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확한 데이터로 뽑아낼 수 있는 카테고리가 아니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알아본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수령할 수 있는 금액도 아니고, 그만큼의 소비를 할 수도 없는 데다 통계청이나 노동청 등에서 정한 것도 아니지만 가치가 연봉 1억 원 정도는 된다고, 막무가내로 믿기로 한 것이다.


물론 어디 가서  "나 연봉 1억 받는 여자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라도 나를 그렇게 대우하며 당당하고 싶은 의지일 뿐.


"그래서 나 연봉이 1억은 될 것 같아~."


남편에게 고지했다.


"어 그래. 그렇다고 해~."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나를 높게 봐줬으면 좋겠어."


"예예, 사모님~. 1억 원의 여자와 산다니..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네~~."


Image by Nicky from Pixabay


그렇게 올해 남편과 협의(?)를 마친 내 연봉은 1억이 됐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오히려 실소를 터트릴 텐데 그게 뭐라고 혼자 피식피식 웃으며 기분이 좋아진다. 무너졌던 자존감도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제 내 연봉에 걸맞게 살림과 육아에 최선을 다해야겠지.


세상 일이 모두 근거가 있고 논리적일 순 없나 보다.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마인드(ENFP입니다만)면 어떤가. 그렇게라도 삶의 재미를 찾으면 되는 거지.

이전 03화 마흔의 이상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