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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Oct 05. 2024

스텐 프라이팬 같은 관계

좁지만 깊은, 예열된 사이

뭐야. 또 눌어붙었어? 아오 C. 


또다. 달걀 프라이를 하려고 했는데 또 프라이팬에 눌어붙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껌처럼. 망할 스테인스!! 한숨에 섞여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스테인스 프라이팬이랑 냄비 싸게 떴길래 주문했어."


어느 날 남편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스테인스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매번 '그냥 싼 것. 적당히 괜찮은 것.' 정도를 추구하며 코팅 팬을 사용하다 벗겨지고 망가지면 새것으로 교체하곤 했다. 남편은 스테인리스 제품은 관리법에 맞게 쓰면 코팅 제품 대비 오래, 안전하게 쓸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로서도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  흔쾌히 "콜"을 외쳤다.


난 바보였다. 스테인스도 일반 제품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새 상품을 기름으로 닦아내고 식초물을 넣고 끓여 연마제를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건 남편이 했으니 내겐 타격이 없다.


문제는 예열이다!!

물을 붓고 끓이는 냄비는 상관없지만(지금까지 없었으니 그런 걸로 한다) 프라이팬은 상황이 달랐다. '적당한' 온도에서 '적정'시간 열을 가해 팬을 예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식재료가 팬과 하나가 돼 욕지거리를 하며 설거지를 해야 할 수 있다. 이미 그러길 수차례 반복했다.


검색창에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예열'을 검색하니 '프라이팬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켠 뒤 1분 30초간 열을 가해하면 기름이 물결치는 현상이 생기는데 이때 물을 끄고 팬을 살짝 식혔다가 사용하면 된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팬을 중약불로 가열하다 물을 몇 방울 뿌렸을 때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팬 표면에 맺혀 움직이는 대로 미끄러지면 예열된 것이다' 등의 방법이 나왔다.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공통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가스불, 인덕션, 하이라이트 등 열원이나 제품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여러 방법들을 참고해서 내맞는 적당함과 적정선을 찾는 게 관건이라는 말이지 않나!!! 프라이팬에 둘러놓은 기름을 태우고, 달걀을 눌러 붙이길 수십 번.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예열은 덧셈뺄셈밖에 할 줄 모르는데 갑자기 미적분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어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꼬리를 꼿꼿 세우고 으르렁대는 날짐승 느낌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지만 예열만 되면 꼬리를 내리고 살랑대며 내게 몸을 비벼오는 것이다. 그때부터 어떤 식재료 앞에서도 팀으로 무적이 된다. 달걀 하나로도 얼음판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춤을 추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우아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 나를 상대로 밀당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꼬임에 홀딱 넘어가 여전히 나만의 '적당함' '적정선'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도 예열이 필요한 사람이다. 유독 새로운 관계를 경계한다.


저 사람이 내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욕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흉을 보고 다다면?


나로 인해 내 아이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지는 않을까?


계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나 자신만의 관계가 아닌 아이로 연결된 관계 더 많아지면서 관계의 깊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블랙홀 너머의 시공간처럼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짐작하는 데 에너지가 집중된다. 식적이진 않지만 드러낼 수도 없다. 가면을 쓰진 않지만 오토바이 헬맷 정도는 쓰고 있는 듯한 만남이다. 떤 날엔 오래된 배터리처럼 방전되고 만다. 계가 적당하지 않고 적정선을 찾지 못 탓이다.


어떤 관계는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예열이 되고, 어떤 관계는 수십 번을 만나도 예열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예열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정성은 다르지만 충분히 열이 올라야 편안해진다.


내겐 그런 관계가 몇 이나 될까. 헬맷을 벗고 볼썽사납게 눌린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마주해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취향이 비슷해서, 생각의 방향이 비슷해서, 혹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던 학창 시절 때부터 함께 해서. 어떤 관계는 MBTI가 정반대인 성격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고목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서. 런 관계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는 나이가 됐다.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의 형태는 좁고 깊어진다. 예열된 스테인리스 프라이팬 같은 관계에 마음을 쏟는 이유다. 그들과 나의 적당함유지하며 잘 예열되고 싶다.


오늘 아침에도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달걀이 눌어붙었다. 또 실패다. 예열된 사람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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