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종영한 드라마 <엄마 친구 아들>에 100년 된 씨간장이 등장하며 그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다.
씨간장은 간장의 씨가 되는 간장으로, 좋은 환경에서 오래 묵혀지며 발효의 풍미가 강하고 염도는 낮은 게 특징이다. 단순히 오래 묵은 것이 아니라 수십~수백 년간 새로운 장과 조금씩 섞이면서 감칠맛이 더해진다(참고 '치의신보').
맛을 본 적은 없지만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 알게된 씨간장은 흔한 간장보다 분명 더 깊고 진한 맛을 낼 것이다.
@픽사베이
사람도 씨간장 같을 수 있다는 걸 최근에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씨간장의 맛이 났다. 20여 년의 시간을 지내오며 더 깊어지고 진해진 맛.
반년만에 친구들과 가족모임을 했다. 사정상 빠진 네 명을 제외하고 어른 11명과 어린이 9명이 모였다. 올해로 21년 째인가, 22년 째인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횟수를 세다 "우리 그냥 20여 년이라고 하자!"며 웃어넘겼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내 나이를 40대로 뭉뚱그리는 것처럼 친구들과의 시간도 20년쯤이라고 결론짓기로 한 것이다. 정확한 횟수보다 중요한 건 그만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길다는 것일 테니.
1년에 두 번밖에 모이지 못하는 친구들이지만 어색함 전혀 없이 바로 어제 만난 사이처럼 편안했다. 이젠 하는 일도, 삶의 방식도 다르고 공유하는 시간도 적은데 어떨 땐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다시 스무 살이 된 것처럼 쉴 틈 없이 얘기하고, 사소한 것에 크게 웃고, 작은 고민에 같이 에너지를 쏟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왜 얘네들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거지?'
생각하다 씨간장이 떠올랐다. 비록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관계가 더 깊고 끈끈해진 것 같달까.그래서 자주 보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2002년.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철없던,세상의 모든 짐은 다 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세상을 모르던, 하고 싶은 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제한적이던 스무 살에 친구들을 처음 만났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 다른 환경에서 자라 멀었던 사이는 공유하는 시간과 추억이 늘어나는 만큼 가까워졌다.
학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 방황하던 청춘의 언덕을 함께 오르며 고민을 나누고 응원했다. 때때로 맞닥뜨린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눈 서로의 서사는 곱게 쌓이고 차곡차곡 모여 (조금 과장하자면)'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햇간장 같았던 우리는 그렇게 씨간장이 됐다.매년 새로 담근 장을 씨간장에 추가해 기존 장과 같은 상태로 숙성되게 하는 것처럼 나이 들면서 다시 새로운 시간들이 더해져 더 진하고 깊어지고 있는 중이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흘러 우리는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바쁘다. 만남의 날이 사계절의 흐름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더뎌져 1년에 두 번, 정기 모임 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 시간들도 꾹꾹 눌러 담아 왔기에 우리는 언제든 금세 가슴속 추억을 떠올리며 깊고 진한 맛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