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었다
이른 새벽, 희미한 여명 아래 어제의 불안을 곱씹어 본다. 완벽이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대던 모습. 모든 것을 통제하려 발버둥 치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 섞인 말에서 위안을 얻는다.
나의 숨겨진 마음을 공감하며 나보다 더 걱정하는 친정아버지께 "아빠! 제가 나름 플랜 B의 방법을 찾고 있고, 알아서 잘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라며 큰소리쳤지만, 밤이면 통제할 겨를도 없이 찾아오는 공황 증세에 홀로 숨죽여야 했다.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 식은땀, 멎어버릴 듯한 숨,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심호흡으로 감추며 간신히 아이를 재웠다.
그때, 여동생의 문자가 도착했다. "언니, 괜찮아? 다 버리고 떠나는 게 안되고, 여기도 일본도 너무 걱정이 돼서 공황이 왔나 보네.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지.'이 말을 자꾸 떠올려 봐. 난 그 말이 도움이 되더라. 거창하게 완벽하게 준비하려 하지 말고 그냥 일본에 팔자 좋게 요양이나 여행 간다고 생각하고, '인생 낭비'하고 오는 걸 목표로 해 봐. 너무 보람되게 있으려고 하지 말고!"
'인생 낭비' 그 단어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는 허락 같았다.
떠나기 전, 나는 완벽한 준비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최선의 어학원, 최적의 가성비 숙소를 찾아야 한다 생각했고, 결혼 후 10여 년 만에 어렵게 처음으로 얻은 혼자만의 시간인데 철저하게 준비해 가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집약적으로 경험하고 크게 성장해 와야 한다 생각했다. 사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안은 한국에 남겨두고 오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ADHD를 가진 아이들이 학년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내가 없는 동안 혹시라도 힘든 일을 겪지는 않을지, 아직 부족한 아이들의 모습들을 보며 강박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위해 촘촘하게 짜 놓은 돌봄 계획이 제대로 작동할지, 혹시라도 빈틈이 생기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챙겨야 할 병원 일정, 밀린 집안일, 마무리하지 못한 개인적 업무들... 떠나기 전까지 해결하려고 했던 여러 가지 미해결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쏜살같이 흘러만 갔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예기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동생의 '인생낭비'하라는 말을 듣고 조금 허술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시간과 가치의 치밀한 기회비용을 따지며 초조해하지 말고, 목적지 없는 방랑자처럼 때로는 한량처럼 무책임하고 무의미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K장녀이자 두 ADHD 아들의 맞벌이 엄마인 나는 평생 한 번도 그리 아무 생각 없이 살아 보지 못했다. 도쿄의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서툰 일본어로 더듬거리며, 실수투성이의 하루하루를 보내더라도. 힐링도 자기 계발도 뭣도 아닌 고작 '인생낭비'만 하게 되더라도.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여정이 꼭 거창한 성공 스토리가 될 필요는 없다. 대실패 스토리면 뭐 어때? 애들 3개월 정도 제대로 못 돌보면 좀 어때? 어차피 지금 나의 불안한 심리 상태로는 내 아이들을 온전히 제대로 잘 돌볼 수도 없는 걸! 우선 나를 잘 돌봐야, 불완전한 내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내 아이들과 이 가정의 불완전함도 좀 더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으리라.
그냥 그저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해결 과제들을 이번 기회에 다 해결하려 하는 건 과욕이야.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며, 불안이라는 그림자의 또 다른 나를 어루만진다.
어쩌면 도쿄는 내게 길을 잃는 것을 허락하는 도시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낯선 골목길을 헤매고, 우연히 마주친 풍경에 발길을 멈추고, 서툰 일본어로 말을 걸어오는 낯선 이들과 눈을 맞추는 시간.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까.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기대되는 여정. 불안이라는 짐을 안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 이 여정이 어떤 색깔로 물들지, 어떤 향기를 남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순간이 나를 더욱 새롭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지금, 불안의 심장을 안고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려 한다. 나의 어설픈 탈출(?) 이야기가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은 파동을 일으켰기를 바래 본다. 앞으로 펼쳐질 나의 도쿄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함께 이 여정을 지켜봐 주길 바란다. 다음 이야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