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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May 02. 2022

 그러니 제발 날 좀 그냥 놔두시오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내 신발 사이즈는 170밀리미터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귀엽고 앙증맞은 그러나 사뭇 비장하고 용감한 꼬마의 모습을 그린 이 첫 문장은 1미터 남짓한 키의 소년이 170센티미터를 넘는 키의 10대 소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동화 같은 일화들을 엮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의 표지를 보았을 때 나의 눈은 삽화 장 자크 상뻬라는 낯익은 프랑스인의 이름에 머물렀다.


오랫동안 기억의 저장고 속에 담겨 거의 잊힌 이름. 장 자크 상뻬는 어릴 적 15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키의 작고 어린 소녀였던 나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는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꼴라’ 책의 삽화를 그린 삽화 가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꼬마 니꼴라의 내용은 잊었지만 그의 유머스러우면서 수채화같이 투명한 삽화는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수업을 위해 읽은 좀머 씨 이야기의 삽화를 바로 그가 그린 것이었다. 1932년 생이니 이제는 부드러운 백발의 푸근한  인상을 지닌 할아버지일 것이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간결한 선에 저절로 선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따뜻한 표정을 품고 있다.


은둔의 독일 작가 파크린트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도 어릴 적 읽었던 꼬마 니꼴라처럼 어린 소년이 주인공이다.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가족과 이웃, 친구들, 특히 그를 에워싸고 있는 광대하고 따뜻한 자연이 그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소년의 유년시절 일화들마다 등장하는 동네의 아저씨가 바로 좀머 씨이다.

책에서 묘사되는 좀머 씨는 매일 이유 없이 걷기만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늘 같은 옷차림에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 걷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은 얘기들을 나누지만 무엇 하나 정확히 확인된 것은 없다. 좀머 씨는 소년이 얘기하는 각  일화의 끝마다 등장해서 그의 성장기를 받쳐주는 하나의 축이 된다.


소년은 피아노 선생님께 혼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혼자 용감하게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나, 꿈꾸던 짝사랑과의 하굣길을 놓쳤을 때, 친구 집에서 몰래 티브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등에서 여지없이 좀머 씨를 만난다. 그리고 그가 걷는 모습뿐만 아니라 나무 밑에서 쉬고 , 빵을 먹는 일상의 모습도 보지만 소년이 보았던 그의 가장 인상 깊은 모습은 그가 스스로 호수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좀머 씨 자신의 생의 끝이면서  소년의 성장기의 끝이기도 하다.


이제 키 170 내외, 발 사이즈 255, 10대 중반에 이른 소년은 숨죽이고 혼자 좀머 씨가 호수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지만 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니 날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했던 이전 그의 외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소년이 1미터 내외의 키에서 170으로 자라기까지의 성장기이자 좀머 씨라는 미스터리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끝내 좀머 씨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걷는 데에 집착했다가  홀로 생을 마감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마냥 동화 같고 순수한 소년의 성장기는  현실감과 개연성을 갖는다. 인생이 마냥 그렇게 즐겁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로 인해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매일 걷듯이 우리도 자기 분량의 삶을 살아내느라 매일 분투한다.

그러나 그 힘겨운 분투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은 바로 소년이 걸어온 동화 속  그 시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독일에서는 좀머 씨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해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좀머 씨를 바쁜 일과에 쫓기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도 하고,어른들의 압박에서 벗어 나고 싶어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마음을 그린다고도 한다.

세계 각국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각기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게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대문 앞에서 바람을 맞아 흔들리던 버드 나뭇가지의 화려한 몸짓, 친구들과 해가 지도록 고무줄놀이 등을 하며 놀다가 동동거리며 집에 돌아가던 기억,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간 시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보던 각종 먹을거리들의 향연. 그 아름다운 기억의 힘으로 나는  이제 소년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어른이 된 지금, 매일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도 따뜻한 위안을 얻고 다시 일상을 추스른다.


어릴 적 읽었던 꼬마 니꼴라처럼 이 책은 눈부신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마법의 책이다.

그 속에서 소년과 함께 나이 들어간 좀머 씨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비록  호수 속으로 사라졌지만 동화 속 그 시절을 가슴속에 간직한 이상, 우리 모두는 분명히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이유가 있다는 설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다시 보면 삶의 아름다운 이유를 전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그러니 제발 날 좀 그냥  놔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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