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을 첨삭받는 기분이란
아이들과 수업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첨삭이다. 공들여 쓴 글을 아이들이 뿌듯한 표정으로 내밀었을 때 첨삭하는 마음은 기대반 부담 반이다. 그래서 아이들 글을 첨삭할 때는 원칙이 있다. 첫째, 빨간펜을 쓰지 않는다. 둘째, 칭찬을 반드시 먼저 써준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만 첨삭한다.
아이들의 글을 첨삭하면서 가끔 누군가 내 글도 이렇게 첨삭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늘 혼자 쓰고 혼자 퇴고하니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한 것도 바로 그런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들과의 수업을 위해 글쓰기 코칭 지도사 과정, 논술 지도법 등의 가르치기 위한 수업은 수차례 들었지만 정작 온전히 나만을 위한 쓰기 수업은 받아보지 못했다.
이번에 큰맘 먹고 별러왔던 글쓰기 수업은 수십 년의 내공을 가진 작가 선생님의 수업이어서 기대가 컸다.
나는 이번에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내 글이 피 흘리고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면서 몸으로 익히고 싶었다.
첫 글쓰기 과제는 '내가 가장 외로움을 느낀 때'에 대해 쓰는 거였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과제를 위해 책상 앞에 앉아 내가 외로움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혹시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바쁘고 부산스러웠던 건 아닌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의 정서가 메말라 있었나. 항상 외로워서 각별히 외로웠던 순간을 인식조차 못한 건 아닌가.
외로움이란 키워드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나의 내면과 일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수일간의 고심 끝에, 온 식구들이 다 잠든 밤 1시에 홀로 화장실에서 고군분투했던 관장의 경험을 떠올렸다.
외로움의 경험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분명 그때 느낀 건 외로움이었노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모두가 잠든 한밤 중, 홀로 변비와 싸우다가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 (남편은 시댁에서 잤다) 관장약을 사러 한밤중 옆동네까지 차를 몰고 나가 관장약을 사 온 경험이었다.
글을 쓰면서야 그날 홀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관장하느라 고생했던 경험이 온몸에 다시 감각되었다. 변을 보기 위해 힘주느라 아프고 괴로웠다고만 생각했는데 글을 쓰면서야 깨달았다.
그때 느낀 건 단순한 관장의 고통이 아니었음을.
혼자 늦은 밤 화장실 바닥을 기며 몸부림쳤던 외로움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관장의 추억'을 합평회에서 낭독했다.
모두 침묵 속에서 말없이 듣기만 했다. 글 하나씩 발표가 끝날 때마다 선생님의 평가가 이어졌다.
칼로 문장이 베어지고, 난도질 당한 가운데 곳곳에 신음과 경탄, 아쉬움의 눈빛들이 오갔다.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글을 평가받아야 하는 거구나.'
시간이 부족해 선생님이 직접 첨삭한 글들을 나눠 주시면서 수업은 마무리 됐다. 첨삭한 글을 보니 정성스럽게 고쳐주신 부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치른 시험에 대한 성적표를 받은 아이처럼, 첨삭된 부분들을 눈에 불을 키고 점검했다.
첨삭된 글을 보며, 나와 수업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첨삭된 글을 읽은 뒤 기쁜 표정을 못 감추고 씩 웃거나, 시무룩하거나, 의아해하던 그 다양한 표정들. 이제 내가 수업 때 다소곳이 선생님의 평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첨삭으로 인해 글 쓸 때 훨씬 민감한 촉수로 쓰게 되었다.
수업 뒤 아이들과 수업할 때 이제 중2병이 시작돼 글을 성의 없이 쓰는 학생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무자비하게 첨삭을 해준 뒤, 아이에게 직접 말로 설명해 줬다. 이전과 달라진 선생님의 모습에 아이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난도질당한 자신의 글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세밀한 첨삭을 통해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건 나뿐이 아니었다. 함께 수업하는 아이들도 이전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글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쓰는 과정은 관장할 때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변을 보고 난 뒤의 시원한 쾌감처럼 첨삭 뒤의 기쁨과 쾌감도 못지않게 큼을 깨달았다.
글을 첨삭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경험과 생각, 삶의 자세도 첨삭받았다.
우리는 첨삭을 통해 인식하지 못했던 글쓰기의 실수뿐 아니라 경험과 생각까지 온전히 감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의 글쓰기 실력은 첨삭을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