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처방, 삶의 처방
여고시절, 학교 문예대회에서 상을 타고 싶어 여러 편의 글을 제출했다. 나름 공들여 소설을 써서 제출했는데 희곡은 아무도 제출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경쟁자가 없으니 내가 써야 되겠다 싶었다.
결과적으로 수상에는 성공했으나 수상 소식을 알려 주셨던 국어 선생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동행아. 문학은 상징이 생명이다. 너의 희곡은 상징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아 솔직히 아쉬웠다."
문학이 거대한 상징과 은유로 이뤄져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이번 수업에서는 수사법에 대해 배웠다
수사법 중 가장 중요한 상징은 의미가 꽉 차 있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이는 원관념이 아닌 보조관념만 나타내는 것으로 주로 시에서 사용된다.
선생님은 상징을 잘 사용한 작품으로 일본영화 'Good, bye', 뱅크시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추천해 주셨다. 윤대녕, 윤후명 작가의 작품들과 김영하 작가의 '당신의 나무'가 적절한 상징을 사용한 작품들의 예로 들 수 있다.
다음 주 과제가 상징을 넣은 글쓰기여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상징할 것들을 궁리했다. 역대 과제물 중 가장 난해한 과제였다.
어떻게 글을 쓸지 고민하는데 거실 구석의 수족관에서 탈출하려 몸부림치는 우리 집 반려동물 주북이(거북이)가 보였다. 마침 주북이에게 먹이를 주며 소곤거리는 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큰아들을 주북이로 상징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분간 쉬고 싶다며 방안에만 머무는 아이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아 답답한 적이 많았다. 글을 쓰면서 우리 아이는 단지 주북이처럼 느릴 뿐이지, 잘못 가고 있는 건 아님을 깨달았다. 비유로 글을 쓰면서 아이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주북이는 수족관 밖으로 탈출했다가도 자기 집을 찾아 돌아오곤 했다. 이처럼 아이도 언젠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갈 것이다.
수족관 밖을 꿈꾸는 주북이를 이해하지 못하듯, 나는 내 속으로 낳은 아들의 속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선생님은 내 글에서 주북이의 마음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을 지적하셨다.
"내가 주북이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거북이가 말한 적 있어요? 그런 건 그냥 추측으로 써요.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요."
나는 아이의 마음도 내 방식대로 판단했다. 그것이 우리 사이의 틈을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주북이와 아이뿐 아니라 타인들의 마음도 내 마음대로 단정 짓고,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살아온 건 아닐까.
글쓰기 수업 이후 내 마음대로 판단했던 무수한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선생님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조언하셨다.
"이거 내가 오은영이 된 것 같은데...한 마디만 할께요. 그 아이 그냥 내버려두어요. 그 애는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어. 이제 엄마가 손을 떼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마요."
상징의 기법으로 글을 쓰느라 고민했는데 선생님은 상징 속 아들과 나의 불화를 간파하셨다.
"주북이의 마음을 내가 모르듯, 아들의 마음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요. 엄마가 이제 아이를 놔주면 돼."
돌아와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주북이처럼 느리지만, 진중하게 큰아들은 자기 길을 갈 것이다. 정작 변해야 될 건 아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임을 깨달았다.
글을 평가받으려 했는데 삶에 대한 처방도 같이 받았다.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