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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ug 17. 2022

이해해요, 그 한 마디의 힘

별이 된 언어

큰애와 많이 부딪히는 편이다.  성격이 예민한 주환이는 엄마가 던지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발끈한다.    어린 때는 순했던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아가 생기고 자기주장이 강해져 가끔 언쟁을 하느라 서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둘째 주호를 학원에 태워주느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는 아이가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는다.

“ 엄마, 전 형을 이해해요. 엄마도 형을 좀 이해해 주세요.”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한 마디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운전석에서 힐끗 보니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엄마와 형이 부딪히는 모습이 답답했는지 아이가 나서서 나에게 권한다.     


이해해요.

엄마인 나도 채 이해하지 못했는데, 정작 나보다 한참 어린 17세의 어린 아들이 형을 이해한다고 한다. 아이 앞에서 얼굴을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웠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해해."  한마디를 참 못하고 살았다.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가르치고 주입하려 했다.   

특히 큰 애에게 더 가혹했다.


불과 6세 어린 나이에 남동생을 둘이나 봐서 형이 돼버린 아이에게 늘 맏이다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너는 맏이니까, 양보해줘, 이해해줘, ~ 해야 돼. ”

그게 사랑이라 믿었다. 맏이인 내가 그렇게 자라왔듯이 맏이인 내 아이도 그렇게 하는 게 부모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자 삶의 방식이라  믿었다.     

정작, 아이가 지치고 아플 때 “그럴 수 있어. 널 이해해.”라는 말을 극도로 아끼며 이해하려는 노력 하지 않았다.  나도 세 아들의 엄마 노릇이 힘겨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고작 19세,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 덩치만 크지  아직 인생의 방향을 몰라서 헤매고, 답답한 아이에게 나는 냉철하고 가혹한 엄마였다.     


큰애가 다가와서 말을 건넬 때마다 정답을 말해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그런 때마다 아이는 늘 나에게 “엄마, 그냥 들어줘요. 난 그저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는 그저 이해받고 싶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 엄마가 인정해 주는 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맏이인 큰애에게 유난히 기대가 컸다.  내가 맏이로 그렇게 자라왔듯이, 맏이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대리인이자, 동생들에게 본이 되고, 형제 중 제일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맏이라는 허울 아래서 철저하게 엄마 된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며 , 나와 결이 다른 아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이 대신 말해준다. “이해해요.”


가끔 생각한다.   만일 아이가 나보다 이해심 많고 인자한 엄마를 만났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착한 맏이 콤플렉스가 없는 자유로운 엄마를 만났다면 더  크게 자라지 않았을까?

모든 일이 무사하고 삶이 달콤할 때 사람은 아버지의 땅에 속한다.

하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어머니의 땅에서 위안을 찾는다. 어머니는 이럴 때 너를 보호한다.  어머니가 거기에 묻히신 게지. 이것이 어머니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중에서 -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어머니의 땅에 위안을 찾아온 아들에게 '이해한다'라는 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어떤 언어는 듣는 이의 가슴을 밝혀주는 별이 되어 박힌다.

나에게 그 언어는 ‘이해해'이다.      

그 빛나는 별, 19세의 눈높이가 되어 이제라도  아이에게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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