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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4. 2023

서번트 신드롬

당구장에서 ~ 18

예술 당구 시범이 인기 있던 시절, 사람들이 당구대 주위를 에워싼다. 뭔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쳐다보니 한 친구가 빈 쿠션으로 두 개의 적 구를 맞춰내고 있다. 시시하다는 생각도 잠시 주위에서 웅성거리며 박수가 쏟아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쉬운 포지션이 아니다. 첫 번째 적 구를 얇게 아주 얇게 맞춰야만 두 번째 적 구가 맞을 수 있는 위치였다. 설마 하며 지켜보니 정확하게 맞춰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친 것도 아주 얇게 맞춘 것이었다. 주위에서 한 번 더 쳐보라며 부추기니 또 들어간다. 우연도 두 번씩이나 겹치기 힘든 일인데 세 번씩이나 맞춰내다니. 


소곤대는 소리를 들어보니 직업이 소매치기라고 한다. 요즘은 CCTV 때문에 매체에서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툭하면 최루탄이 터지던 그 시절은 쓰리 꾼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길 정도였다. 본능이 당구에 표출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정교해야 하나 흉내 내보지만 맞춰낼 재간이 없다. 수십 번 쳐도 겨우 맞춰낼까 말까 하는 포지션을 연달아 세 번씩 성공시켰으니 한마디로 신의 경지였다. 스치듯 말 듯 적 구가 까딱거리며 맞았다고 흉내 내는 모습에서 마구마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포지션을 두고서 백번씩 쳐 봐라.” 배우는 과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도받는 과정이다. 고전처럼 두고두고 내려오는 가르침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 또한 기본 포지션을 백번씩 소화시킨 경험이 있으며 여러 선수들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하지 싶다. 백번 쳐서 내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지만 여전히 똑같은 포지션을 밥 먹듯 실수하고 있는 내 모습. 하물며 눈을 감고 연습했음에도 내 것이 안 되었는데 연속해서 맞출 수 있는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백번만 연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게 잡아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 되어야 겨우 공감이 간다. 실패하면 잡혀갈 것을 잘 알기에 죽을 각오로 연습하지 않았을까. 지갑을 넣고 빼고 하는 상상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이 상상된다. 일류 선수들이 치는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을 치는 그 순간은 누구와도 소통이 필요 없다. 불필요한 동작을 절제하며 오직 맞춰내기 위해 반복된 훈련만 하지 않았을까. 연습량이 쌓이고 쌓여서 내 것으로 만들고 또 쌓여서 **서번트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이다.


과학자는 발견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가는 창조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고 한다. 당구에 발견과 창조를 비유하기에는 모자람이 넘치겠지만 반복하는 열정은 여느 분야 못지않은 자존심이다. 반복되는 촉감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구와 적구가 맞는 순간 그립을 쥔 손이 먼저 알아차릴 정도로 촉감은 예민하다. 촉감의 반복으로 기량이 출중해진다. 오직 반복이다. 잘 알지만 쉽고도 지겨운 일이다. 쉬워서 게을리하는 것은 아닌지. 지겹다고 그만두는 것은 아닌지.


당구뿐만 아니다. 스포츠의 모든 분야와 사회의 많고 많은 직업도 반복의 연속이다. 듣는 것도 반복이요 보는 것도 반복이다. 단지 누가 더 많이 반복하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며 차별을 두고 있다. 한 줌의 밥 뭉치를 셀 수 있는 일식집의 주방장. 팔씨름 선수의 아령 훈련. 구구단과 원소주기율표를 외우는 것도 놀라운 반복 능력이다.


살면서 성취를 위한 과정을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이 참 많다. 아마도 누구나의 일이지 싶다. 지난날의 미련에 이렇게도 아쉬움이 남다니. 당구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니 그냥 당구와 같았던 것 같다. 딱 백번씩만 반복했을 뿐이다. 단지 백번씩 연습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감을 드러내버린 부끄러운 내 모습. 왜 백 한 번을 치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골백번을 치려하지 않았을까. 




*아스퍼거 증후군 : 자폐증과 유사한, 소아에서 나타나는 장애. 남아에 많으며, 지속적인 사회관계 형성에 장애가 있고, 제한되고 정형화된 유형의 행동을 보인다. 

**서번트 신드롬(증후군) : 지적 장애나 자폐증 따위의 뇌 기능 장애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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