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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6. 2023

당구人

당구장에서 ~ 30

학창 시절 당구 한 번 쳐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있다면 내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적어도 호기심에 한 번쯤 쳐봤다는 대답을 듣고 싶을 뿐이다. 개중에 부정적인 선입견과 미래를 위해서 또는 부모들의 강요로 떠나보낸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겠지. 잘 안다. 변화된 세상이 찾아왔다지만 그래도 사회는 학벌을 중시하기에 당구를 포기해야 했던 맘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깨어있는 부모들은 당구 속에 내포된 집중력과 창의력 그리고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지만 자제를 요구했을 것이다. 당연함을 위한 절제력을 부러워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따라쟁이가 된들 얼마나 그 꿈을 성취할 수 있을지. 단지 당구를 사랑하기에 자유분방함에 한 표 던지고 싶은 이기심은 당구장 주인과 나만의 한결같은 공통점이지 싶다.  


개중에 세상이 무엇인지 돈이 무엇인지 공부와 담쌓은 청소년들이 당구를 냅다 품어버리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랬었다. 부모님 말씀은 뒷전이요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때로는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시간의 틈을 당구가 비집고 들어오기도 한다. 요즘은 부모들이 먼저 나서서 조기교육을 시키는 세상이다. 고등학교에서도 당구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대학도 물론이다. 상업사회는 이들에게 기꺼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당구에 빠져든다는 것은 매력 있는 일이다. 최고가 아니어도 좋다. 당구 치는 그 순간만큼 모든 잡념이 사라져 버리니 이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승리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패하더라도 아쉬움의 재도전으로 자아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당연한 노력과 인내 · 끈기 · 극복 · 열정 · 등 곁가지처럼 무수히 뻗어있는 세상살이의 양념들을 잘 조합해야 한다. 만족스러운 결과라도 나온다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삶 속 지혜를 배우는 과정과도 닮는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소중한 시간을 무참하게 빼앗아버린다. 단지 잘 치기 위한 욕심일 뿐인데 인생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야속함으로 남는다. 당구와 생존의 밀고 당김에서 생존의 편에 서게 되는 아쉬움인 것이다. 짜장면 한 그릇에 울고 웃는 배고픈 당구 밥을 바라보자니 이미 고뇌와 슬픔의 과정이 연상된다. 단지 당구를 좋아한 것이 전부인데 그것이 죄가 되어 이별할 수밖에 없다니. 슬픔의 과정은 언제나 기약 없는 기다림과 새로운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당구는 큐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미련한 스포츠요 야속한 스포츠가 된다. *


때로는 인간사의 환멸로 당구를 떠나보낸 이들도 적잖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죽을죄를 짓지 않은 이상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 이익을 좇는 인간들이 둘셋만 모여도 탈이 나는 법 아니었던가. 다방면의 직업군이 모여드는 당구장. 양념들을 잘 조합해서 승리해 본 경험처럼 관계의 소중함을 자각하여 당구와 인생의 상관관계를 잘 풀어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이 또 어디 있을까.

 

다시 찾은 당구 밥 손목이 서운하다며 왕년의 기운을 쉬 돌려주지 않는다. 당구공도 말 안 듣기는 마찬가지다. 뒤 돌려치기나 대회전은 쳤다 하면 키스가 난다. 머리가 띵하지만 그래도 좋다. 마냥 좋다. 정적을 꿰뚫듯 ‘떼구루루’ 굴러가는 공 소리는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함마저 묻어난다. 적당한 긴장감과 두려움 · 쾌감 · 슬픔 · 눈물 · 환희 · 괴로움 · 고독 · 인간 속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감정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가 당구 말고 무엇이 있을까.


언제 또다시 큐를 접을지는 점쟁이도 모를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 때문이든 가정사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지금이 소중한 시간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새로운 삶의 내공이 켜켜이 쌓여만 간다. 어느새 성숙한 자아는 정적 · 동적 움직임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다. 고수의 길을 향한 자물쇠를 건네받았으니 일상 또한 편안함의 연속이다. 사랑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가 보다. 당구를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이 진정한 ‘당구인’이 아닐까.


행여 큐를 접더라도 당구 소식은 나를 지켜주는 애완견이다. 사회적 능력과 재력으로 평가됨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잣대는 공의 궤적을 겨냥할 뿐 소리에 물질적 의미가 더해지지 않는다. 인위적 복잡함을 던져버리고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함을 즐겨보는 거다. 과정에서 복잡함이 더해지지만 차원 다른 품격이기에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 모습이 마치 생명의 정교함과 닮기 때문이다. '깨우쳐야 할 세상의 소리' 당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된다. 이제 다음 창을 여는 일만 남는다.




* 당구장의 삼대 거짓에 속한다. 이제 다시 당구를 안친다지만 언제고 또다시 큐를 잡게 된다. 참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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